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에서 1000억달러(약 144조원) 추가 투자를 이끌어 낸 미국이 5년 뒤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 생산량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현재 미국은 이 시장 점유율 11%로 3위인데, 한국을 훌쩍 뛰어넘어 이 분야 2위로 올라서고, 1위 대만과의 격차도 큰 폭으로 줄일 것이라는 내용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도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통상 14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보다 큰 공정을 의미하는 성숙 공정(범용) 파운드리 생산량 점유율은 지난해 대만이 43%, 중국이 34%였다. 하지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2027년에는 중국이 45%로 대만(37%)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 반도체 제조는 한국과 대만이 주도해 왔다. ‘미국의 설계 - 한국·대만의 제조 - 중국의 소비’가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제조마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업계에서는 “한국과 대만이 수십 년간 보유한 ‘반도체 강국’ 타이틀을 미국과 중국에 넘겨줄 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픽=박상훈

◇“TSMC 美 공장 생산 일정 당겨질 듯”

6일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 생산량 점유율은 2021년 11%에서 2030년 22%로 늘어날 전망이다. 첨단 반도체 생산량은 4나노보다 미세한 첨단 파운드리 공정 등 각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이 적용된 생산 시설을 의미한다. 대만은 같은 기간 71%에서 58%로, 한국도 12%에서 7%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첨단 반도체 생산 점유율 확대는 TSMC가 미국 현지 생산량을 늘린 영향이 크다. 2020년 TSMC는 650억달러(약 94조원)를 투입해 미국 애리조나에 공장 3개를 짓기로 했다. 1공장은 최근 4㎚ 제품 양산에 돌입했다. 2공장은 2027년, 3공장은 2030년 생산 라인을 가동할 계획이었다. 최근 TSMC가 미국에 100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하기로 하면서 일정도 앞당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트렌드포스는 “최근 통상 갈등과 관세 문제로 TSMC는 생산 일정을 앞당기고 있다”며 “2공장과 3공장은 2026~2028년 사이에 대량 생산에 돌입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작년 초 미국은 2030년까지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의 5분의 1을 자국에서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는 업체에 총 527억달러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도체법(칩스법)을 내세워 반도체 산업 지원에 나섰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칩스법 폐지 방침을 밝혔음에도, TSMC 추가 투자를 유도하며 결국 점유율 20%를 넘기겠다는 목표에 다가선 것이다.

◇中 첨단 반도체 연구 실적 압도적 1위

중국의 반도체 제조 역량은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 2년 뒤 범용 파운드리 점유율은 중국(45%)이 대만(37%)을 넘어서 1위가 될 전망이다. 범용 반도체는 상대적으로 구식 기술이 적용된 반도체이기는 해도 자동차나 디스플레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요가 늘고 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80%는 범용 제품이다.

범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중국은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작년 5월 중국이 조성한 65조원 규모 반도체 투자 펀드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등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 확보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메모리 분야 첨단 공정으로 뽑히는 16나노(nm)를 적용한 DDR5 양산을 시작했다.

반도체 연구·개발 실적은 중국이 다른 국가를 압도하고 있다. 미국 조지타운대 신기술동향관측소가 영어로 작성된 반도체 관련 논문을 분석한 결과, 중국은 2018년부터 2023년까지 6년간 총 16만852편을 발표했다. 2위 미국(7만1688편)을 배 이상 앞지른 수치다. 미국과 3위 인도(3만9709편), 4위 일본(3만401편)의 논문 수를 모두 합쳐도 중국이 발표한 논문 수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국은 2만8345편으로 5위를 차지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은 첨단 반도체에서 뒤처져 있고, 첨단 장비 구입이 제한돼 있지만 차세대 반도체 기술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은 논문 수뿐만 아니라 인용 횟수에서도 압도적 1위였다. 인용 횟수가 상위 10%에 들어가는 논문 중 중국 연구진이 작성한 논문은 2만3520편으로 전체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이어 미국(1만300편), 한국(3920편), 독일(2716편) 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