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선반의 엔진 부품들을 반대편 선반에 옮겨서 정리해줘.”
인간 모습의 2족 보행 로봇이 사람 지시에 따라 가로 형태 선반 틈에 보관된 부품을 손으로 뺐다. 로봇 얼굴에 달린 카메라로 옮겨야 할 빈 선반이 세로 형태인 것을 파악하고 부품을 세워서 꽂았다. 부품이 한 번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 손으로 다시 눌러 끝까지 집어넣기도 했다. 무릎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부품을 줍는 등 움직임도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지난 5일 현대차 산하 로봇 개발 업체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영상을 통해 공개한 2족 보행 로봇 ‘올 뉴 아틀라스’의 AI(인공지능) 학습 과정이다. 현대차는 이 로봇을 올해 연말 생산 공장에 처음 시범 투입해 사람과 함께 작업하게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로봇 제어 AI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부품을 나르는 것과 같은 단순 반복 작업을 로봇에 맡겨 근로자 부담을 줄이고 생산 효율성을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를 비롯해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개발에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로봇과 AI가 결합한 이른바 ‘피지컬AI’를 미래 먹거리로 보고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이다. 피지컬AI는 로봇처럼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하는 AI 기술을 말한다. 생성형 AI라는 뛰어난 ‘두뇌’를 장착해 외관뿐 아니라 동작까지 사람과 흡사한 첨단 로봇을 개발한다는 목표다.
현재 휴머노이드 시장은 구글·메타·테슬라 등 미국의 빅테크와 중국 기업들이 주도해 왔다. 국내 기업들도 연구 조직을 개편하고 투자를 늘리며 개발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피지컬AI 뛰어든 한국 기업들
테크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삼성리서치 등 그룹 내 사업부, 연구소별로 흩어져 있는 로봇 개발 인력을 한곳에 모아 50여 명 규모의 ‘로봇 사업팀’을 꾸린 것으로 알려졌다. 올 상반기 출시 예정인 가정용 반려 로봇 ‘볼리’ 등 기존 상업용 로봇 제품군은 사업 부서에서 계속 개발하고, 신설된 로봇 사업팀에선 휴머노이드 등 미래 첨단 로봇 개발에 주력한다.
삼성전자는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 자회사로 편입한 로봇 업체 레인보우 로보틱스와 R&D(연구개발) 협력도 늘려갈 계획이다. 레인보우 로보틱스는 2족 보행 휴머노이드 ‘휴보’를 개발한 업체다. 삼성은 지난달 이 업체 지분 인수 대금 지급을 마무리한 데 이어 지난 5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기업 결합 승인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2월 레인보우 로보틱스 지분을 인수하면서 한종희 DX부문장(대표이사 부회장) 직속의 미래로봇추진단을 설립했다. 레인보우 로보틱스 창업자인 오준호 카이스트 명예교수가 단장을 맡고 있다.
LG전자도 최근 미국 상업용 자율주행 로봇 기업 베어로보틱스의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로봇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LG는 미국 가전전시회 CES에서 선보였던 AI 집사 로봇 ‘Q9′을 연내 출시할 예정이다. 휴머노이드 개발을 위한 기초 연구도 시작했다. LG전자 최고기술책임자(CTO) 산하 로봇선행연구소에선 최근 중국 유니트리 로보틱스의 최신 휴머노이드를 구입해 관련 기술에 대한 연구·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삼성·LG 등 국내 기업들이 휴머노이드 개발에 뛰어든 것은 향후 무인 공장 로봇, 가사용 로봇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첨단 반도체 공정을 운영한 노하우를 살려 산업용 휴머노이드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다. LG전자는 엑사원 등 자체 AI 모델을 개발한 경험과 가전 분야에서 축적한 소비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다 자연스러운 가정용 로봇 개발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조 역량으로 美中 추격
휴머노이드 분야에서 한국 기업은 후발 주자에 속한다. 미국과 중국 기업들은 생성형 AI 기술을 기반으로 사람처럼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로봇을 시장에 내놓고 있다. 이들 기업과 비교하면 한국은 5년 넘게 기술 격차가 난다는 평가다.
하지만 업계에선 “로봇은 제조 기술 역량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에 승산이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AI와 같은 소프트웨어 역량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로봇 구동의 핵심 요소인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에서 우리 기업들이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이를 잘 결합하면 향후 시장 주도권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로봇업계 관계자는 “삼성은 자사의 보행 보조 기술, 로봇 제어 알고리즘 특허를 활용해 보행 보조 웨어러블(착용형) 로봇 ‘봇핏’을 개발했다”며 “한국은 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이 부족하지만, 제조 기술이 중요한 로봇에서 경쟁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