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 등 글로벌 빅테크들이 인공지능(AI)과 더불어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기술이 있다. 바로 양자 컴퓨터다. ‘양자역학’이라는 미시 세계의 물리 이론을 컴퓨터에 접목하는 미래 기술이다. 이 분야의 세계적 과학자 중 한 명이 김정상(56) 듀크대 전기컴퓨터공학과·물리학과 교수다. 그가 크리스 먼로 당시 메릴랜드대 교수와 양자컴 기업 ‘아이온큐’를 공동 창업한 것이 2015년. IBM이 상용화된 양자 컴퓨터를 공개하기 1년 전이었다. 김 교수는 지난 6일 본지 인터뷰에서 “요즘 한국 젊은 수재들이 다 의대를 선택하는 게 좀 걱정“이라며 ”세계 갑부 50위 중에 의사는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불안함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면 리스크(위험)가 생각보다 작을 수 있다”며 “도전적으로 살아도 삶이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굉장히 짜릿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처럼 양자 컴퓨터·인공지능·생명공학 등 최첨단 분야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기술 경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한국 출신 과학자들이 세계 곳곳에 있다. 본지가 이들을 연쇄 인터뷰하며 기술 트렌드뿐 아니라 연구 환경, 인재 육성, 후학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한국 사회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안정적 삶을 ‘정답’으로 생각하는 생각이 뿌리 깊다”고 입을 모았다. 김 교수는 “미국처럼 도전하는 사람을 우대하는 문화와 체계가 잡혀야 한다”며 “실패를 바탕으로 재도전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자 컴퓨터 상용화도 ‘챗GPT 순간’처럼 순식간에 올 수 있다”
김정상 교수는 자신이 창업한 ‘아이온큐’를 떠나 학계로 복귀했다. 그는 “양자컴이 상용화되려면 정말 파괴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회사의 일상을 바쁘게 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런 아이디어를 찾는 게 쉽지 않다”며 “한발 떨어진 곳에서 깊은 생각을 하고,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미국의 기술과 기업 생태계를 겪은 김 교수는 지금의 한국을 어떻게 바라볼까?
-지금 부소장으로 있는 듀크 양자 센터(DQC)는 어떤 곳인가.
“DQC는 학계에서도 독특하게 양자 컴퓨터의 기초 기술부터 응용까지 다양한 층위를 동시에 연구하는 곳이다. 학계에선 여전히 양자컴 연구가 소자(素子) 단위의 오류를 줄이는 기초 기술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해선 응용 단계까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DQC가 톱다운 방식으로 응용 단계의 연구를 병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선 이런 연구가 가능할까.
“요즘 한국에선 의대를 우선적으로 많이 가는데, 정말 의학에 열정이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길이라는 인식 때문에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세계 갑부 50위를 보면 의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 진학이 아닌 양자컴처럼 파괴적인 기술을 만들어보겠다는 도전을 많이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업계든 학계든 큰일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모두 도전적 자세를 갖고 있다. 젊은 친구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도전적으로 살아볼 만하다.”
-한국은 ‘도전’을 응원하는 문화가 아닌 것 같다.
“나도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나왔을 때 도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교육 자체가 그걸 추천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미국은 도전하는 사람을 우대하는 문화와 체계가 잡혀 있다. 한국은 창업하면 일단 아파트부터 팔고, 배수진을 치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은 워낙 투자자도 많은 데다, 혁신 마인드가 확실하면 창업자에게 ‘아파트 팔았냐’ 같은 질문을 안 한다. 그러니 창업에 실패해도 재도전이 가능하다. 미국은 큰 기업들이 스타트업을 인수하며 창업 생태계를 키워가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김 교수가 처음부터 물리학자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의대를 목표로 했다. 그는 “고3 여름방학 때 선생님의 추천으로 물리학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막상 공부를 시작해 보니 너무 재밌었다”고 했다. 좀 더 공부를 깊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만든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도 창업 생태계를 키우려 하는데 잘 안 된다.
“미국은 기업가 정신을 아주 높게 평가한다. 기술은 연구실을 나와 제품으로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파괴적인 힘을 갖는다. 창업 환경이 발달된 미국에선 혁신과 도전 마인드만 확실하다면 맨손으로도 창업에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 또 실패에서 배운 경험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실패를 바탕으로 재도전하는 것을 높게 산다. 한국은 창업가에 대한 인식이 미국만큼 좋지 않고, 창업했을 때 성공할 기회도 미국보다 적다. 창의적인 길은 젊은 창업자들이 여기저기 부딪쳐 보는 과정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지금 유독 창업 정신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나
“지난 몇 십 년간 한국은 남들이 잘하는 걸 빠르게 따라잡는 것으로 커왔다. 지금 기술적으로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기회이고, 다른 이에게는 위기다. 이럴 때 얼마나 창의적 대응을 하는지가 향후 수십 년 동안 한국이 어떤 산업을 기반으로 먹고살지를 결정할 것이다. 지금까지 남을 따라가는 전략으로 성공한 세대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경험이 부족할 수 있다. 아예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젊은 창업자들이 여기저기 부딪쳐 보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나와야 하는 이유다. 한국의 이공계 인재들이 의사 이외에도 이런 중요한 도전을 할 수 있을 때 한국의 미래가 밝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 교수는 양자컴 분야에서 학계와 창업을 모두 경험했다. 양자컴은 엄청난 속도의 연산력으로 AI와 결합될 경우 기존에 상상하기 어려운 기술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양자컴 기술이 어디까지 왔나.
“지금의 양자컴을 일반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1960년대 초반 미 항공우주국(NASA)에 처음으로 도입됐던 컴퓨터 ‘IBM 7090’이라고 할 수 있다. 극소수만 쓸 수 있는 거대한 기기란 뜻이다. 컴퓨터의 상용화는 인텔이 집적회로를 상용화하고, 값싼 작은 휴대용 전자계산기가 나오면서 시작됐다. 양자컴은 아직 이처럼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토대가 없다. 다만 최근 학계·업계가 양자컴 연구에 자본과 인력을 집중하는 만큼, 그 난관을 넘어서는 기술이 곧 나타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빅테크의 양자컴이 나오면서 양자컴 상용화에 대한 기대가 크다.
“양자컴의 상용화를 말할 때 대부분 생각하는 것은 기존 컴퓨터로 풀 수 없는 암호 해독을 수행하는 양자컴의 출현이다. 지금의 기술 발전 속도를 봤을 때, 이 같은 난제를 해결하는 양자컴이 나오는 데 20~30년이 걸린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암호 해독보다 훨씬 쉽고, 일상을 변화시키는 데 더 의미가 있는 응용 서비스는 얼마든지 그보다 빨리 나올 수 있다. 양자컴 분야의 ‘챗GPT 모멘트(챗GPT 출현을 계기로 AI가 급성장한 순간)’는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시간 내에 이뤄질 수 있다. 내가 20년 전 양자 컴퓨팅 연구에 뛰어들 때만 해도 진짜 활용은 50년, 100년이 걸린다 했다. 이 같은 예측 기간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고, 보수적인 학계가 보는 것보다 변화는 항상 빠르게 진행되어 왔던 것 같다.”
-양자컴이 기술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예를 들어, 더 효율적인 AI를 만드는 데 양자컴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지금의 AI는 대량의 데이터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며 비싸게 만들어지는데, 양자컴 기술을 활용하면 훨씬 적은 매개변수를 써서 데이터의 패턴을 정확하게 추측하는 AI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양자컴을 활용한 큰 시장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지만, 수십 년 동안 보기 어려웠던 거대한 기회이기도 하다.”
☞김정상 교수
김정상 교수는 1992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논문 ‘단일 광자 빔 발생 장치 연구’는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되며 양자 기술 개발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벨연구소를 거쳐 2004년부터 듀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15년 양자 컴퓨터 기업 ‘아이온큐’를 창업했고, 2021년 뉴욕 증시 상장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듀크대의 과학기술 전략을 총괄하는 최고 과학기술 전략가로 임명됐다.
☞양자 컴퓨터
미시 세계에서 적용되는 양자물리학을 이용한 컴퓨터다. 일반 컴퓨터는 전자의 유무(有無)에 따라 0과 1의 비트(bit)로 정보를 표현하고 계산한다. 반면 양자 컴퓨터는 큐비트(qubit)가 기본 단위다. 큐비트는 0과 1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어, 연산 속도가 획기적으로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