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미국의 강력한 제재를 뚫고 반도체 핵심 기술 확보에 성공하며 ‘반도체 역공’에 나섰다. 최근 중국 정부는 데이터센터용 반도체와 관련해 에너지 효율 기준을 강화했다. ‘전력 소모가 적은 반도체를 사용하라’는 내용의 이 규제는 사실상 미국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칩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가 중국 시장을 겨냥해 만든 AI 칩 ‘H20’이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규제의 구체적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중국산 반도체는 이를 피해갈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자,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H20 확보에 열을 올렸다. 엔비디아 고성능 칩을 위해선 밀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이번 규제안은 중국 반도체 역량이 일정 수준으로 올라온 만큼, 엔비디아 없이 자국 칩으로 AI 개발을 이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과시한 것”이라며 “사실상 중국이 미국 반도체를 대상으로 ‘수입 규제’를 한 셈”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 거절하는 중국
26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지난해 데이터센터를 새로 짓거나 확장할 때 높은 에너지 효율 기준을 충족하는 반도체를 써야 한다는 규제를 도입했다. 엔비디아의 H20 전력 소비량은 시간당 400와트(W)로, 당국의 기준 대비 전력 소비량이 높아 사실상 금지 품목으로 분류된다.
중국은 이 규제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를 근거로 자국 테크 기업들에 ‘H20 구매를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FT는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당국은 지난 몇 달 동안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텐센트 등에 H20을 구매하지 말라고 은밀히 권고해 왔다”고 전했다.
중국은 엔비디아 칩 대신 자국산 반도체 확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실제로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금융 계열사인 앤트그룹은 화웨이가 개발한 반도체를 사용해 AI 모델 ‘링플러스’ 개발에 나섰다. 구체적으로 어떤 반도체를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업계에선 화웨이가 최근 내놓은 AI 칩 ‘어센드 910’이 사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제품은 딥시크가 추론형 AI 모델인 ‘R1’을 개발할 때도 사용한 것이다. 화웨이는 현재 추론용 AI 모델을 위한 AI 칩 ‘어센트 910C’의 본격 양산에 나섰다. 이 제품은 엔비디아의 이전 세대 제품(‘호퍼’ 시리즈)과 성능이 맞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엔비디아 AI칩 제재’ 소식은 곧장 시장에 파장을 일으켰다. 엔비디아의 주가는 26일 전날 대비 5.74% 떨어진 113.76달러에 마감했다. 지난해 중국에서만 103억달러(약 15조원)의 매출을 기록한 엔비디아엔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 투자도 세계 최대
중국의 반도체 역공은 자국 장비 기업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은 화웨이를 중심으로 반도체 설계 역량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반도체 제조 기술은 크게 뒤처져 있었다. 특히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인 노광 장비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노광 장비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미세한 회로를 새기는 핵심 장비다.
◇中, 노광 장비까지 공개
네덜란드 ASML의 최첨단 노광 장비인 EUV(극자외선)는 2019년부터 중국 수출이 전면 금지됐다. EUV보다 기술이 떨어지는 DUV(심자외선) 장비에 대한 규제도 시행 중이다. 이 때문에 중국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지난 26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막한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차이나’에서 중국 반도체 장비 업체 시캐리어(SiCarrier)의 DUV 노광 장비가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2023년부터 화웨이 제품에 탑재되는 7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 칩 생산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장비다. 보통 7나노보다 미세한 반도체 공정은 EUV 노광 장비를 사용한다. 하지만 중국은 DUV만으로 7나노 미세 공정에 성공한 것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회사 측은 구체적인 성능은 밝히지 않았지만, 일부 DUV 장비는 5나노 생산도 가능하다”고 했다.
중국은 반도체 장비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중국의 반도체 장비 투자액은 380억달러로 세계 최대 규모다. 반도체 선진국으로 꼽히는 한국(215억달러), 대만(210억달러), 미국(140억달러)을 뛰어넘는 규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