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CEO/사진=뉴스1

인공지능(AI) 반도체 분야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 엔비디아가 ‘미국산(産) AI 서버’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공개했다.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AI 서버’는 AI 반도체를 조립해 만드는 것으로, AI 모델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일종의 컴퓨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앞세워 첨단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추진 중인 가운데, 엔비디아가 대만 기업들과 손잡고 AI 반도체 설계부터 제조, 조립, 테스트까지 전 공정을 미국에 구축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14일 엔비디아는 자사 블로그에 “향후 4년 안에 파트너사인 TSMC, 폭스콘, 위스트론, 앰코, SPIL과 미국에서 5000억달러(약 711조원) 규모의 AI 생산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라며 “이는 오직 미국에서 AI 수퍼컴(서버)을 생산하는 최초의 사례”라고 했다. 지금까지 엔비디아는 AI 서버에 들어가는 대부분 부품을 한국·대만 등 아시아에서 조달했다. 엔비디아가 첨단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설계하면, TSMC가 대만에서 이를 생산한다. TSMC는 한국에서 생산되는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들여와 GPU와 함께 조립한다. 이를 대만 폭스콘이 대만·멕시코 등에서 최종 AI 서버로 만들어 미국에 수출한다. 하지만 앞으론 AI 서버 생산 과정을 모두 미국에서 진행해 관세 문제를 피해가겠다는 구상이다.

그래픽=김성규

◇엔비디아와 ‘팀 타이완’

엔비디아가 이 같은 ‘미국산 AI 서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주요 대만 파트너사가 미국에 제조 시설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반도체를 전량 생산하고 있는 TSMC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지은 신규 생산 시설에서 지난 1월부터 엔비디아의 최신 AI 칩인 블랙웰 생산을 시작했다. 엔비디아는 또 “애리조나에서 패키징 및 테스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앰코 및 SPIL와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후공정까지 마친 칩은 지금까지 폭스콘·위스트론 등 서버 제조 업체의 미국 밖 생산 시설로 옮겨져 조립되고 있다. 하지만 이날 엔비디아는 “텍사스에 폭스콘(휴스턴), 위스트론(댈러스)과 함께 축구장 약 13개 크기에 해당하는 100만 제곱피트(약 9만3000㎡) 크기의 제조 공간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폭스콘은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있는 공장 등에서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수퍼컴인 ‘GB200 NVL72’를 조립해왔지만, 지난해 말 휴스턴 내 공장 부지를 인수하며 ‘미국 제조’에 나섰다. 지금까지 대만에서 서버를 조립하던 위스트론도 지난해 텍사스에 생산 시설용 토지를 인수했다. 엔비디아는 “두 공장 모두 향후 12~15개월 안에 본격 양산에 돌입할 것”이라고 했다.

엔비디아는 이날 발표한 투자금 5000억달러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이는지 밝히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생산 시설 구축 비용뿐 아니라 엔비디아가 파트너사에 발주한 물량이 포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블룸버그는 “5000억달러라는 수치는 엔비디아가 AI 공급망에 판매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제품의 총 가치”라고 했다. 공급망 위기로 미국에 생산 시설을 구축할 수밖에 없는 파트너사들을 돕고, 미국에 대대적으로 투자한다는 명분까지 챙겼다는 것이다.

◇젠슨 황, 美 투자로 AI칩 대중 수출 얻어내

이날 엔비디아가 발표한 파트너사 중 옛 아남반도체의 후신으로 미국 애리조나에 본사를 둔 앰코를 제외한 모든 기업이 대만 기업이다. 대만 출신의 젠슨 황 CEO가 대만 기업과 함께 미국 내 첨단 AI 반도체 공급망을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엔비디아의 발표로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더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엔비디아 AI 공급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투자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 공급망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와 TSMC 입장에선 트럼프와 관계를 고려할 때 가능하면 미국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를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의 투자 발표가 나온 후 미국 백악관은 “이는 트럼프 효과가 실제로 나타난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은 수백만 달러가 아닌 수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규모로 미국에 투자하고 있다”며 “나는 그 투자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황 CEO가 대규모 투자로 중국용 저사양 AI칩인 ‘H20’의 수출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황 CEO는 지난주 트럼프의 사저가 있는 마러라고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했고,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9일 H20 수출 규제를 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