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핵심 반도체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제조 장비 시장을 두고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 한화세미텍 등 국내 대표 기업 간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HBM은 메모리 반도체인 D램을 8단·12단 등으로 쌓아서 만든다. ‘TC 본더’라는 반도체 장비는 열과 압력을 가해 쌓아 올리는 D램을 서로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동안 HBM 시장의 글로벌 1위인 SK하이닉스에 한미반도체가 이 장비를 독점 공급해 왔다. 하지만 최근 후발 주자인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에 TC 본더를 본격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업계에 지각 변동이 발생하고 있다. 오랜 동맹 관계이던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그 틈을 한화세미텍이 파고들면서 소송전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픽=양진경

◇복잡한 ‘삼각관계’

2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한미반도체는 최근 SK하이닉스 HBM 생산 라인에 상주하던 인력 50~60명 정도를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SK하이닉스와 함께 TC 본더의 운영과 수율 관리 등의 업무를 해왔다고 한다. 한미반도체는 한발 더 나아가 SK하이닉스 측에 TC 본더의 가격을 약 25% 인상하고, 무료로 해오던 장비 유지·보수도 유료로 전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는 2017년 TC 본더를 공동 개발했고, 이후 SK하이닉스에 들어가는 TC 본더는 거의 전량 한미반도체가 공급했고, 한미반도체는 이 시장에서 70% 점유율로 세계 1위가 됐다.

두 회사의 갈등은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에 TC 본더 장비를 발주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한화세미텍에 420억원 규모의 HBM용 TC 본더 장비를 발주했다. 한화세미텍이 2020년 TC 본더에 본격 진출한 뒤 SK하이닉스에 처음으로 공급한 물량이다. SK하이닉스가 핵심 장비 공급망을 다변화하기 위한 시도라는 분석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회사들이 장비 공급사를 2~3개 두는 것은 업계에서는 일반적”이라며 “SK하이닉스도 한미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두 회사와 잘 조율해 나간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반도체도 SK하이닉스가 신규 장비 공급사를 선정한 것 자체에는 큰 불만이 없다고 한다. 다만 새 공급사가 한화세미텍이라는 점이 한미반도체를 자극했다는 것이 업계의 해석이다.

한미반도체는 한화세미텍을 상대로 각종 소송전을 벌이며 견제해 왔다. 한미반도체는 2021년 한화세미텍으로 이직한 전 직원에게 부정경쟁행위금지 소송을 제기했고,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지난해 12월에는 한화세미텍을 상대로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한 장비 업계 관계자는 “한미반도체로서는 소송 상대인 한화세미텍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대해 거래처인 SK하이닉스에 가격 인상 등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고객사이지만, 한미반도체의 요구를 마냥 무시하기 어렵다. 한미반도체가 시장을 과점한 ‘수퍼 을(乙)’ 위치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HBM은 제조 공정이 까다롭기 때문에 어떤 장비를 쓰느냐에 따라 수율 등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화세미텍으로서는 SK하이닉스를 고객으로 확보하기 위해 한미반도체와의 소송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한화세미텍은 상황에 따라 대응해 나가겠다는 입장으로 전해졌다.

◇갈등 해소될까

HBM 제조 장비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하는 것은 이 시장의 성장성이 크기 때문이다. AI 열풍으로 HBM 시장이 커지면서 TC 본더 시장도 2024년 4억6100만달러(약 6500억원)에서 2027년 15억달러(약 2조1000억원)로 3배 넘게 성장할 전망(JP모건)이다. 한 장비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 하나만 잡아도 세계 HBM용 장비 시장을 잡는 셈”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장비 업계는 이달 말 SK하이닉스의 발주에 주목하고 있다. HBM용 TC 본더 물량을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이 얼마나 나눠 가지느냐에 따라 갈등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끼리 싸우다 한국이 HBM 시장의 주도권을 놓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TC 본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제조하는 데 필수적인 장비다. HBM은 D램을 쌓아 만드는데, TC 본더는 열과 압력을 가해 여러 층의 D램을 일정한 간격으로 결합시킨다. 한미반도체가 HBM용 TC 본더 시장에서 세계 점유율 약 70%로, 1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