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후 서울 대치동 소재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 공간에 국내 로봇 관련 스타트업 및 상장사 7곳과 한국산업은행·신한은행·삼성·현대차 등 27개 기관·기업 관계자들이 모였다. 2조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하는 벤처캐피털(VC)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에서 주요 로봇 기업들과 로봇 산업에 관심이 많은 투자자(LP)들을 연결해주기 위해 개최한 네트워킹 행사였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관계자는 “로봇 분야만 특정해 네트워킹 행사를 개최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최근 인기인 딥테크 투자 중에서도 AI 로봇 분야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이 고도화되자 이를 로봇 같은 물리적 장치와 연동시키는 ‘피지컬 AI(운동 지능)’ 기술에 집중하는 로봇 기업들이 미래 핵심 투자처로 떠오른 것이다.
제조업이 발달한 덕분에 산업 현장에서 로봇을 가장 많이 쓰는 국가(국제로봇연맹 로봇 밀도 1위)로 꼽히기도 했던 우리나라에선 최근 로봇 기술에 대한 투자가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같은 주요 대기업들도 각각 레인보우로보틱스와 베어로보틱스 같은 국내외 로봇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했고, 증시에 상장하는 국내 로봇 기업도 급격히 늘며 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매년 국내 증시에 상장한 로봇 기업 수는 1곳 정도에 그쳤지만, 작년에는 엔젤로보틱스·케이엔알시스템·하이젠알앤엠·씨메스·클로봇·티엑스알로보틱스·피앤에스미캐닉스 등 무려 7개 로봇 기업이 상장했다. 지금까지 국내 증시에 상장한 로봇 기업은 34개뿐이다. 맹두진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사장은 “로봇 시장은 30조달러(약 4경3000조원)에 달하는 인간 노동 시장을 대체하는 거대한 시장”이라며 “생성형 AI(LLM)나 자율주행보다 더 큰 시장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상용화되기 시작한 국산 AI 로봇
국내 로봇 기업들은 실제 생성형 AI 등장 이후 로봇 산업이 과거와 달리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1999년 창업한 1세대 토종 로봇기업으로 로봇 전용 액추에이터(모터·감속기 등)를 만드는 ‘로보티즈’의 김병수 대표는 “30년 가까이 로봇 사업을 해왔지만, 최근 2년 사이 시장의 신호가 심상치 않아 큰 변화가 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며 “우리 같은 경우 액추에이터 작년 출하량이 전년 대비 45% 급증했다”고 말했다. 액추에이터가 그만큼 많이 팔린다는 건 로봇 개발 및 생산에 나서는 곳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의미다.
AI 기술이 접목된 로봇들은 벌써 산업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 작년 코스닥 상장에 성공한 지능형 로봇 개발 기업 씨메스(CMES)는 비전 AI 기술로 물체를 보고 구별해 옮기는 로봇을 개발해 최근 현대·기아차 공장은 물론 쿠팡과 CJ대한통운 같은 물류 기업에 납품하고 있다. 이성호 씨메스 대표는 “과거 로봇은 물류 창고에 있는 수백만 종에 달하는 물건을 하나하나 분류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AI 기술 덕분에 가능해졌다”며 “이전 물류 로봇의 경우 큰 물건을 집어들 때 작은 박스가 함께 따라오는 ‘럭키박스’ 문제가 종종 있었지만, AI 기술을 적용하고서는 10만건의 1건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의료 분야에서도 본격적으로 AI 로봇이 활용되고 있다. 로봇 스타트업 메디인테크는 전동식 유연 내시경 로봇을 개발해 식약처 의료기기 허가와 병원 임상시험을 마친 뒤 올해부터 상용화에 나섰다. 메디인테크의 내시경 로봇은 AI가 스스로 움직임을 조정해 식도나 항문 내벽을 긁지 않고 위장이나 대장 진입이 가능하다. 생검이 필요한 병변도 자동으로 탐지해 내고 의사가 관측하지 못한 부분도 알려준다. 이치원 메디인테크 대표는 “서울대병원에서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도 성공적으로 마쳤다”며 “올해부터 일선 병원에 납품을 시작하며 매출을 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피지컬AI의 핵심은 손(手)
AI 기반의 인간형 로봇(휴머노이드) 개발 경쟁도 치열하다. 테슬라나 구글 같은 미국 빅테크들이 적극 뛰어들면서 세계 로봇 산업의 핵심 경쟁 무대로 꼽히고 있다. 국내에서도 로보티즈와 홀리데이 로보틱스, 에이로봇 등 많은 로봇 기업이 휴머노이드 개발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 AI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서 가장 어려우면서 많은 기업이 집중하는 분야는 바로 ‘손(手)’이다. 인간의 다리는 바퀴 등으로 교체하는 것이 오히려 비용이나 기능 면에서 더 효율적일 수 있지만 다양하면서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손은 따라 만들수록 기술 경쟁력이 생긴다. 하지만 다양한 접촉점을 갖고 잡는 물체에 따라 감각적으로 다르게 반응해야 하는 손 구현 기술은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다. 로봇 기업들은 정교한 작업을 감각적으로 해내는 인간의 손을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조업 특화 AI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 중인 스타트업 홀리데이로보틱스는 1g 무게까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민감한 촉각 센서를 부착한 로봇 손을 개발해 적용 중이다. 송기영 홀리데이로보틱스 대표는 “손으로 하는 정교한 작업의 안전성을 위해 로봇 손의 무게를 인간 손 무게(500g) 수준까지 가볍게 만들고 있다”며 “오는 7월 공개를 목표로 AI 휴머노이드 ‘프라이데이’를 개발 중”이라고 했다.
로보티즈 역시 이달 피지컬 AI 기반의 작업형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AI 워커’를 공개했다. 숙련된 작업자의 동작 데이터를 토대로 AI가 모방 및 강화 학습해 용접·조립·검사·분류 같은 정교한 작업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병수 대표는 “완성차 공장에서 유일하게 로봇이 대체하지 못한 작업이 바로 하네스(전기 배선) 작업”이라며 “로봇의 손이 복잡한 전선을 정리하고 꽂을 수준이 되면 휴머노이드 시장은 본격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최근 창업했지만 초기(시드) 투자에서 21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업계 주목을 받은 로봇 AI 파운데이션 모델(RFM) 개발 기업인 ‘리얼월드’ 역시 사람의 손재주를 따라잡을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 나선 에이로봇의 최고기술책임자(CTO)인 한재권 한양대 로봇공학과 교수는 “피지컬 AI 경쟁력의 원천은 산업 내 행동 데이터”라며 “최대한 빨리 시중에 로봇을 내놓고 활용해 얻은 데이터로 로봇 AI 기술을 고도화하는 게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