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양인성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만드는 국내 스타트업 ‘리벨리온’은 첫 해외 지사로 일본을 낙점하고 지난 2월 도쿄에 법인을 설립했다. ‘챗GPT’를 개발한 오픈AI를 비롯해 MS·아마존·오러클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이 일제히 일본에 대규모 데이터센터 설립에 나서자, AI 반도체 수요 증가를 예상하고 일본에 진출한 것이다. 리벨리온 관계자는 “일본에 뚜렷한 현지 경쟁자가 없는 지금 진출해야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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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성장하는 일본의 AI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현지 진출하는 국내 AI 스타트업이 늘고 있다. 일본은 과거 디지털 전환에 뒤처져, 한국 스타트업에 매력적인 시장은 아니었다. 일본 소비자를 겨냥해 웹툰·메신저·중고 거래 등 플랫폼 기업들이 주로 진출했다. 최근 일본이 민관 차원에서 인공지능 전환(AX)을 적극 추진하면서, 반도체·소프트웨어·로봇 등 한국의 기술 기업들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스태티스타는 일본 AI 시장이 올해 101억5000만달러에서 2031년 411억9000만달러(약 54조3000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해 한국 시장 전망치(약 21조6000억원)의 2.5배가 넘는다.

◇일본 AI ‘시장 불균형’이 계기

최근 몇 년간 일본에 진출하는 AI 스타트업은 꾸준히 늘고 있다. 기업용 AI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올거나이즈’는 2022년 본사를 아예 일본으로 옮겼다. 현재 고객사의 60%가 일본 기업이다. 문서 정보 추출용 AI 모델(도큐먼트 파스)을 만들어 기업에 판매하는 ‘업스테이지’ 역시 지난달 일본 법인을 설립하고 현지 인사를 법인장으로 선임했다. 이활석 업스테이지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일본의 업무용 문서량은 한국 대비 10배 이상으로 10%만 선점해도 한국 시장을 장악한 효과 이상을 볼 수 있다”며 “해외 빅테크 유사 모델과 비교해 정확도와 속도가 앞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국내 AI 스타트업들이 대거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가장 큰 배경은 일본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대규모 투자와 함께 AI 기술 도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작년 11월 AI와 반도체 산업에 2030년까지 최소 10조엔(약 97조8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일본 정보경제사회추진협회(JIPDEC) 조사에선 생성형 AI를 활용 중이거나 도입을 추진하는 현지 기업이 70%에 달한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 스타트업 생태계가 발달하지 않았다. 일본에선 기업들이 원하는 AI 서비스를 공급해 줄 곳을 찾기 어려운 ‘시장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2023년 일본 법인을 설립한 국내 AI 스타트업 ‘슈퍼브에이아이’ 관계자는 “현재 주요 고객사인 일본제철 같은 경우 산업 현장에 적용할 AI 기술을 찾았지만, 이를 구현해 줄 일본 기업이 없었다”며 “결국 한국에 있는 우리 회사에까지 연락을 한 것”이라고 했다. 슈퍼브에이아이는 현재 일본제철에 철강 제품 품질 검수 및 재활용 분류를 해주는 비전 AI 소프트웨어를 공급 중이다.

◇든든한 지원군, 글로벌 투자 유치

해외 투자 유치가 활발한 점도 국내 AI 스타트업의 일본 진출을 가속하는 요인이다. AI 포털 기업인 뤼튼테크놀로지스는 일본 투자를 받은 것을 계기로 현지에 진출했다. 뤼튼은 일본 최대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인 Z벤처캐피털(ZVC)의 투자를 받았다. 리벨리온도 비슷하다. 작년 1월 투자 유치에 참여한 일본 벤처캐피털 다이와벤처스(DGDV)를 통해 현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잠재 고객을 확보했다.

한국 AI 스타트업의 일본 공략이 활발해지면서, 초기 투자에 적극 나서는 일본 기업도 늘고 있다. 제조업 특화 로봇용 AI 소프트웨어 모델 개발에 나선 스타트업 ‘리얼월드’는 일본 통신사 KDDI, 일본 항공사 ANA홀딩스, 미쓰이화학, 시마즈 제작소 같은 기업에서 총 210억원의 초기 투자를 유치했다. 류중희 리얼월드 대표는 “제조업 기반이 강한 일본에서도 공장에 쓸 로봇용 AI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기술 개발을 마치는 대로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기술 검증(PoC)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