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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보세요. 암을 조기에 진단해 내는 일에서 시작해, 자신이 걸린 특정 암에 대한 맞춤형 백신을 단 48시간 안에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AI)이 약속하는 미래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바로 다음 날이었던 지난달 21일 미국 백악관 루스벨트룸. 트럼프가 AI 기반 시설 구축 등에 5000억달러(약 720조원)를 쏟아붓겠다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숨 가쁘게 발표한 참이었다. 이때 함께 발표에 참석한 세계 2위 소프트웨어 회사 오러클의 래리 엘리슨 창업자는 막대한 투자에 나선 AI의 대표적 쓸모를 이렇게 ‘암(癌) 정복’에서 찾았다.
더욱 치열해지는 암 전쟁에서 ‘AI 히포크라테스’가 인류의 최강 우군으로 등장했다. AI는 암을 ‘진단’하고 ‘치료’하며 ‘예방’하는 세 단계에서 삼도류(三刀流)로 암을 무찌르고 있다. 전 세계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최상위 원인인 암을 정복하면 AI가 곧 ‘불로초’가 돼 인간 수명을 연장하는 도구가 되리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마틴 스타이네거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AI가 더 효과적인 개인 맞춤형 암 치료법 개발로 가는 길을 닦고 있다”며 “이러한 연구는 많은 암을 우리가 다스릴 수 있는 질환으로 서서히 바꿀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치명적 질병이었던 천연두가 백신 접종으로 사실상 사라진 것처럼 미래엔 ‘암 때문에 사람이 죽은 적도 있다’는 사실이 역사책에나 나올 얘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WEEKLY BIZ는 AI 기술을 등에 업은 인류가 암의 위협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분석했다.
◇AI 진단: 족집게 암 식별
지난해 9월 공개된 하버드대 메디컬스쿨의 암 진단 AI 모델 ‘치프(Chief)’는 암 조기 진단의 희망을 보여줬다. 연구진은 “‘치프’는 각종 암 관련 검진 이미지 분석에서 정확도 94%를 기록했다”고 했다. 검진 이미지 1500만건과 암 조직 19종류의 이미지 6만건으로 훈련받은 치프는 종전 AI 암 진단 모델에 비해 36% 뛰어난 암 진단 실력을 선보였다. 영국의 의료 기업 케이론메디컬테크놀로지스가 개발한 유방암 검진 AI 프로그램 ‘미아(Mia)’ 역시 유방 촬영 이미지를 분석하는 분야에서 의사 등 의료 전문가들이 놓친 미세한 종양을 13% 더 잘 찾아내는 것으로 분석됐다.
AI 암 진단 모델의 최고 강점은 정확성과 속도다. 케임브리지대 병원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협력해 개발한 AI 암 진단 프로그램 오사이리스(Osairis)는 진단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는데, 이 덕분에 의료진은 기존 진단 방식을 쓸 때보다 2.5배 빨리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AI는 엑스레이나 MRI(자기 공명 영상) 등과 같은 암 검진 이미지를 가장 기본적인 픽셀 단위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미세한 종양도 잘 찾아낸다. 의사처럼 지치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져 종양을 놓치지도 않는다. 배석철 충북대 의대 교수는 “엑스레이 사진이나 조직 검사를 통해 확인되는 암의 모습은 환자마다 매우 다양하며, 암 조직과 정상 조직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해 종합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AI는 암 초기 단계의 오진 가능성을 줄여 준다”고 했다.
‘조기 진단’은 암 환자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특히 생존율이 낮고 많은 사람 목숨을 앗아가는 폐암 같은 암은 일단 빨리 찾아내는 게 관건이다. 폐암은 초기에 찾아냈을 때 생존율이 81~85%로 늦게 발견했을 때 생존율(15~19%)의 네 배가 넘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유방암도 종양 크기가 15㎜보다 작을 때 찾아내면 치료 시작 이후 5년간 생존율이 90% 수준으로 높아진다.
AI는 암 진단에서 ‘눈’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특유의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암 위험군’을 재빨리 찾아내는 데도 발군이다. 하버드대와 덴마크 코펜하겐대는 AI로 수백만 명의 의료 기록에서 ‘누가 언제 어떤 질병에 걸렸나’를 확인해 췌장암 고위험군의 특성을 찾아내는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담석, 빈혈, 당뇨병이나 기타 소화기 관련 문제로 진료를 받으면 3년 후에 췌장암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AI 치료: 따뜻한 문진에 효과 좋은 신약까지
AI는 암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는 환자의 마음까지도 다독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연구진이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의 ‘의사에게 물어보세요’ 게시판에 올라온 환자들의 질문 195가지를 무작위로 뽑아 인간 의사와 챗GPT가 답변토록 한 뒤 이 답변들을 의사 면허를 지닌 전문가 패널에게 평가토록 했다. 그 결과, 챗 GPT의 답변이 우수하다는 응답 비율이 의사 답변이 우수하다는 응답보다 3.6배 높았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에 대한 평가에서도 9.8배 높은 점수를 받았다.
새로운 항암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AI의 활약은 커지고 있다. 암은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생기는 병이다. 최신 항암제는 암의 성장이나 전이를 돕는 단백질은 억누르고, 암을 억제하는 단백질의 기능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에 좋은 항암제를 만들기 위해선 단백질의 어느 부위에 항암제가 달라붙어야 해당 단백질의 기능을 억제하거나 활성화할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게 중요한데, 알파폴드와 같은 AI 모델을 활용하면 효과적으로 공략 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알파폴드가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이 배치된 순서만 보고도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예측해 주는 기능을 갖췄기 때문이다.
AI로 항암제를 만드는 건 먼 미래 일이 아니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다보스포럼에서 자신이 설립한 스타트업인 ‘아이소모픽 랩스’가 AI를 활용해 설계한 신약이 올해 말쯤에는 임상 시험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허사비스 CEO는 지난해 AI 프로그램인 알파폴드를 개발한 성과 등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는데, 그가 AI로 공략하려는 주요 질환 중 하나가 암이다. 그는 다보스포럼에서 외신과 인터뷰하며 “보통 한 약물을 발견하는 데 평균 5~10년이 걸린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10배로 가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인류 건강에 엄청난 혁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AI는 신약 설계 단계부터 활약이 크다. 딥마인드는 지난해 9월 신약 설계에 특화된 AI 모델인 알파프로티오를 공개했다. 알파프로티오는 신약 후보 물질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몸속 물질과 최대한 잘 결합하도록 분자 구조를 설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알파프로티오가 설계한 화학물질은 암이 성장하거나 다른 기관으로 전이될 수 있도록 돕는 혈관내피성장인자-A(VEGF-A)를 포함해 암 치료를 어렵게 만드는 세 가지 단백질에 기존 약물 대비 최고 300배 강한 결합력을 선보였다. 나중에 같은 설계를 적용해 이런 단백질에 잘 결합하는 항암제를 만들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알파폴드와 알파프로티오 같은 AI 모델의 등장은 신약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실제로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암 연구 전문가인 마이클 레빗 스탠퍼드대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알파폴드 등을 활용해 단 30일 만에 간암 치료 후보 물질을 새롭게 찾아내기도 했다.
◇AI 예방: 개인 맞춤형 암 백신까지
‘AI 히포크라테스’가 족집게처럼 암을 찾아내고 빠르게 치료해 낸다고 해도 암 환자의 고민은 또 있다. 재발(再發)이다. 이런 이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는 묘약이 ‘암 백신’이다. 그리고 이런 암 백신의 출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이 앞당겼다. 주요 바이오 기업들이 코로나 사태 때 백신 개발 과정에서 주목받았던 mRNA(메신저 리보핵산) 기술을 활용해 암 백신 개발에 나서는 것이다.
세포면역학 전문가인 이승우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는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급속도로 발전한 mRNA 백신 기술을 암 치료에 적용한 백신이 조만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백신과 암 백신이 몸속에서 병을 막는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mRNA란 물질은 인체 안으로 투여되면 몸 안의 세포가 특정 단백질을 만들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설계도’ 역할을 한다. 인간의 몸속에 주입된 코로나 mRNA 백신은 세포로 하여금 바이러스의 특징을 가진 항원 단백질을 만들도록 한다. 그러면 몸 안의 면역세포는 이를 바이러스가 침투했다고 여기고 없애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면역세포 일부가 바이러스의 특징을 기억한다. 이후 인체는 ‘진짜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잘 방어할 수 있다. 면역력을 갖춘다는 뜻이다.
암 백신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암 환자의 암세포 내부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돌연변이 단백질인 ‘신항원(neoantigen)’이 코로나 백신의 ‘바이러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차이다. 암 백신을 통해 신항원에 대한 정보를 기억했던 면역세포가, 몸에서 다시 암세포가 자라나려고 하면 재빨리 공격하는 원리다.
이런 암 백신을 만들 때 AI는 곳곳에서 제 실력을 발휘한다. 백신 때문에 정상적 조직이 의도하지 않은 면역반응을 일으켜 몸에 해가 되진 않을지, mRNA 백신을 어떻게 정교하게 설계하고 제조할지 등 개발 곳곳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같은 암에 걸린 암 환자라도 암세포 내부에서 만들어진 신항원은 사람마다 차이가 난다. 암 백신은 기본적으로 기성품이 아닌 ‘개인 맞춤형 백신’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AI를 동원해야 이러한 맞춤형 백신을 적기에 생산해 투약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이런 암 백신은 언제쯤 현실화될까. 코로나 백신으로 이름을 알린 모더나는 ‘mRNA-4157’이라는 암 백신을 개발해 임상 시험을 진행 중이다.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을 겨냥한 백신이다. 모더나는 지난 6월 “면역 항암제인 키트루다와 함께 (이 백신을) 투약한 환자 집단은 키트루다만 투약한 환자들과 대비 재발 및 사망 위험이 49% 감소했다”며 “암 환자들이 2년 반 동안 재발 없이 살아 남은 ‘생존율’은 74.8%”라고 발표했다. 화이자와 함께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독일 바이오앤테크는 제넨텍과 손잡고 ‘오토진 세부메란(BNT122)’이라는 암 백신을 개발했고, 췌장암과 대장암 재발 억제 효과가 있는지 임상 시험 중이다.
코로나 백신으로 주목받았던 두 기업의 CEO는 인류 역사에 암 백신이 코로나 백신보다 더 큰 족적을 남길 것이라고 장담한다. 스테판 방셀 모더나 CEO는 지난 8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10년 후에 사람들은 우리가 코로나 사태 때 한 일(백신 개발)을 다 잊을 것”이라며 “그때 우리는 가장 주목받는 암 치료 기업으로 탈바꿈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구르 사힌 바이오엔테크 CEO 역시 “mRNA 백신을 (암 치료를 위해) 개인 맞춤형으로 개량해 온 것이 우리 회사가 달성한 가장 중요한 혁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사망 1위 암, 국내에선
다만 국내에선 암이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파른 인구 고령화가 우선 문제다. 나이가 들수록 세포 내 손상이나 돌연변이도 함께 늘고, 면역 기능도 떨어져 암 환자는 그만큼 늘어나기 쉽다. 더구나 가공식품 섭취와 불규칙한 생활 습관 때문에 젊은 층에서도 암이 늘고 있다. 암은 국내에서 사망 원인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83년부터 2023년까지 부동의 ‘사망 원인 1위’였다.
이에 국내 연구진도 ‘AI 우군’을 통해 암을 정복하려는 연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의료 AI 기업 루닛은 암 검진을 돕는 AI 모델 ‘루닛 인사이트 CXR(폐암)’과 ‘루닛 인사이트 MMG(유방암)’ 등을 개발해 냈다. 혈액 속에 있는 아주 미세한 입자까지도 AI로 잡아내 암 진단의 지표로 삼는 기술도 나왔다. 최연호 고려대 바이오의공학부 교수 등이 이끄는 연구팀은 혈액 검사로 폐암, 대장암, 간암 등 암 6종 발병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앞으로 관련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 국내외 의료 현장에서 AI가 홀로 암을 진단하고 치료 방식을 설계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나시르 나밥 독일 뮌헨공대 컴퓨팅·IT학부 교수는 “만약 AI가 사람의 도움 없이 일반 의사처럼 진단을 내리는 수준까지 발전하면 AI 암 진단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환자가 크게 늘 것”이라며 “AI 암 진단 프로그램은 배운 것을 까먹거나 은퇴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전문성을 쌓아나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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