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김의균·DALL-E

세계 기술 패권의 왕좌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란 두 거인이 링 위에서 혈투 중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은 이미 최고 기술력을 가진 분야가 많지만, 중국 역시 빠르게 성장해 미국을 추월한 분야가 적잖다. 미·중 양국이 인공지능(AI)에서부터 양자 컴퓨팅까지 각종 첨단 기술 분야에서 경쟁하는 가운데 이들의 싸움 판세를 분석한 보고서가 나왔다.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CEO)가 설립한 미국의 정책 연구소 특수경쟁연구프로젝트(SCSP)가 지난 2월 내놓은 ‘결투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Arena)’란 제목의 보고서다. 비영리적·비당파적인 SCSP가 내놓는 보고서는 미국 정부의 핵심 기술 정책 수립에 영향을 끼쳐왔다. WEEKLY BIZ는 이 61쪽짜리 보고서 및 이 보고서를 작성한 데이비드 린 수석이사가 지난 1월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USCC) 청문회에서 발언한 증언 내용 등을 밑줄 치며 분석했다.

그래픽=김의균

◇재주는 미국이, 돈은 중국이 먼저?

미국은 강력한 민간 부문 생태계, 글로벌 협력, 탄탄한 기초 기술에 힘입어 각종 첨단 기술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런데 이런 최강 미국을 중국이 빠르게 따라오고 심지어 일부 앞지를 수 있었던 건 첨단 기술 분야를 키우는 양국의 전략이 달랐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보고서는 “미국은 ‘혁신’에서 앞섰지만, 중국은 ‘상용화’에 앞섰다”고 했다. 미국이 혁신 기술을 내놓으면 중국은 ‘돈이 되도록’ 빠르게 상업화했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가 합성 생물학(생명체를 인공적으로 설계, 제작 또는 변형해 새로운 특성을 갖게 만드는 기술) 분야다. 미국은 2012~2023년 사이 이 분야에서 2만306건의 논문(전체 논문의 33.6%)을 쏟아내 중국(1만3122건)을 압도했다.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이나 게놈(유전체) 설계 기술 등이 발전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의 이런 연구를 응용해 상업적으로 전환하는 데 탁월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전 세계 합성 생물학 특허 건수 점유율은 전체의 49.1%로 미국(12.8%)보다 약 4배 수준에 달한다.

◇中, 제조업을 접목한 분야서 강했다

SCSP는 주요 첨단 기술 12개 분야를 추려낸 뒤 미국과 중국이 이 분야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는지 판세<그래픽>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국의 우세라 판정 난 분야는 ‘첨단 배터리’ ‘5G(5세대 이동통신)’ ‘상업용 드론’ ‘(산업용 로봇과 자동화 등을 통한) 첨단 제조’ 등 4개 분야가 꼽혔다. 첨단 배터리의 경우 중국은 리튬·흑연과 같은 원자재에서부터 최종 제품까지 밸류체인(value chain·기업 활동에서 부가가치가 생성되는 과정) 전반을 장악했다는 평가다. 중국은 전 세계 리튬 이온 배터리 출하량의 약 80%,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약 60%를 차지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5G 기반 시설 구축에서도 중국이 압도적이다. 중국의 기지국 수는 약 400만개(인구 10만명당 206개)로 배치돼 미국의 기지국 숫자 약 10만개(인구 10만명당 77개)보다 훨씬 많다. 상업용 드론의 대표 주자인 중국 DJI는 글로벌 개인용 드론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처럼 중국이 앞선 첨단 기술 분야엔 공통점이 있었다. 린 수석이사는 청문회에서 “중국의 가장 큰 (첨단 기술 분야) 발전은 고속철도 시스템이나 재생 에너지 개발에서 알 수 있듯이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활용하는 분야에서 나타났다”며 “중국은 제조 시설을 연구·개발(R&D) 허브와 공동 배치하는 작전으로 새로운 혁신 기술을 빠르게 실험하고 또 효율적으로 적용해나갔다”고 했다.

◇여전히 미래를 여는 나라 미국

그래도 미국은 여전히 각종 핵심 기술 혁신을 이끄는 나라다. 기존 컴퓨터의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양자 컴퓨팅’이나 궁극의 에너지원이라는 ‘핵융합 에너지’ 분야 등 핵심 기술을 개발하며 미래를 열고 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왓츠앱 등과 같은 소셜미디어나 모바일 플랫폼 부문에서도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은 압도적이라는 평가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엔 미국이 첨단 기술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날 선 제언도 포함됐다. 우선 지적된 건 미국 정부와 민간 사이의 기술 개발 우선순위가 어긋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보고서는 “지난 3년 동안 미국 산업계는 AI나 핀테크, 사람과 기계 사이 인터페이스(정보를 주고받는 접점) 기술과 같은 (고수익) 분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반면 미국 정부나 기관은 여전히 첨단 네트워크 등과 같은 기초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정부와 민간 사이 전략 불일치는 미국의 첨단 기술 상용화와 확산에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대표적 사례는 AI 데이터 센터다. 보고서는 “미국에선 2030년까지 전력의 최대 8%가량이 AI 데이터 센터 등에 쓰일 수 있다”면서 “미국이 (기업 수요에 맞게 정부 차원에서) 전력 공급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에너지 병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핵심 격전지는 세 곳이다

그렇다면 미·중 양국이 첨단 기술 분야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붙고 있는 분야는 어디일까. 보고서는 경합 분야로 ‘AI’ ‘차세대 네트워크’ ‘바이오 제약’ 등 세 분야를 꼽았다. 중국의 AI 기술은 저비용·고성능 AI 모델인 딥시크 공개를 기점으로 존재감이 크게 부각됐다. 그럼에도 현재 AI 통계치만 놓고 보면 미국이 중국을 압도한다. 지난해 스탠퍼드대가 내놓은 ‘AI 인덱스 보고서’를 보면 2023년 기준 미국의 민간 AI 투자액은 672억2000만달러로 2위인 중국(77억6000만달러)의 8.7배 수준이다. 그러나 중국의 AI 공세는 갈수록 거세지는 양상이다. 보고서는 “중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대규모 언어 모델 개발자를 보유한 나라”라며 “알리바바·바이두 같은 소수정예의 국가 대표 기업이 AI 발전을 주도하고, 칭화대 등 학계가 AI 스타트업의 핵심 허브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지구 저궤도(고도 500~1500㎞) 위성 등을 통한 차세대 네트워크 분야도 미·중 기술 전쟁이 불붙고 있다. 저궤도 위성 분야 기존 강자인 미국에 대응해 중국은 지난해 8월 인공위성 18개를 쏘아 올리며 ‘천범성좌(千帆星座)’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바이오 제약 분야에서도 기초연구에 강한 미국과 의약품 생산에서 앞선 중국이 격돌 중이다.

◇삼중고 중국, 기술 혁신에 매달린다

중국이 이처럼 기술 혁신 분야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는 건 중국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해서기도 하다. USCC 청문회에선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026년 4.2%까지 둔화되고, 2022년 이래 중국 인구가 연속으로 감소하는 등 내부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됐다. 더구나 이 같은 상황이 미국과의 지정학적 긴장이 계속 고조되는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어 삼중고를 겪는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중국이 기술 혁신에 더욱 매진하고 있다는 게 청문회 증언에서 나온 얘기다.

다만 아직 미래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린 수석이사는 청문회에서 “기술 패권은 누가 미래를 발명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미래를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미국이 첨단 기술이란 혁신을 넘어 이 기술을 빨리 현실로 구현해내고 상용화해야 기술 패권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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