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죽는다’는 느낌은 어때? 지금쯤은 익숙해졌겠지만 말이야. 자알 죽고, 내일 만나!”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미키17’. 이 영화 속 주인공이자 17번째 삶을 살던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가 ‘니플하임’이란 행성에서 크레바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미키의 친구인 티모(스티븐 연)는 도움의 손길 대신 이런 말을 남기고 현장을 떠난다. 미키17은 2054년 미래를 그린 공상과학(SF) 영화다. 지구가 더 이상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으로 접어들자, 식민지 행성 개척단이 새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는 얘기를 담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설정은 ‘휴먼 프린팅’이란 기술이다. 생체 정보와 과거 기억을 업로드해 두면 죽은 사람을 몇 번이고 재출력해 살려낼 수 있다는 이 기술이 영화의 기본 흐름을 끌고 간다.
그렇다면 영화에 나오는 휴먼 프린팅 기술은 실제로 구현 가능한 것일까. 인류는 ‘인간 재출력’이란 마법을 통해 영생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까. WEEKLY BIZ가 휴먼 프린팅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봤다.
◇이미 4조원짜리 바이오 프린팅 시장
영화 속 미키는 새로운 생명을 받고 출력될 때 기존에 저장해 둔 생체 상태 그대로 기계에서 뽑혀져 나온다. 저장된 얼굴에 여드름이 났었다면 새로 출력된 얼굴에도 여드름이 그대로 복제되는 식이다. 영화 속에선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할 때 쓰는 원통형 기계처럼 생긴 ‘프린터’<사진>에서 마치 잉크젯 프린터에서 종이가 덜컥덜컥 나오듯 사람이 출력된다.
기존 동물 복제 기술은 체세포 핵 이식 방법으로 배아를 복제해 자궁 속에 길러내는 방식이었다면, 미키17에선 마치 공장에서 똑같은 물건 찍어내듯 사람을 찍어내는 기술이 가능해진다는 설정을 담았다. 사람 한 명을 통째로 만들어내는 휴먼 프린팅 기술은 현재로선 구현이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윤리적 문제까지 불거질 수 있어 실현될지 의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신체의 일부분을 만들어 내는 ‘바이오 프린팅’이란 연구는 한창 진행 중이다. 바이오 프린팅은 3D(3차원) 프린터의 원리를 활용해 사람 신체의 각 부위를 구현해낸다. 3D 프린터가 섬유나 플라스틱 등의 소재를 한층 한층 쌓아 입체적인 사물을 만들어내듯이 바이오 프린팅은 장기나 뼈, 피부 등을 만들어낸다. 특히 바이오 프린팅은 만들고자 하는 생체 정보를 입력해 두면 기존과 같은 모양과 기능의 신체 부위를 뽑아낼 수 있어서 영화 속 휴먼 프린팅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시장조사 기관 프리시던스리서치는 바이오 프린팅 시장이 이미 지난해 기준 30억달러(약 4조4000억원)에 이르며 2034년엔 130억5000만달러 규모로 4.4배 수준으로 커질 것으로 예측했다.
◇정형외과 등에선 이미 이식 성공
현재 바이오 프린팅 기술은 두개골, 턱, 척추 등 정형외과에서 주로 다루는 신체 부위에서 가장 큰 진전을 이룬 상태다. 세포나 혈관 같은 복잡한 조합이 필요 없어 제작이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이미 손상된 치아나 뼈를 보완하는 임플란트 형태의 의료 보철물 제작은 이미 현실화됐다.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할 땐 우선 3D 스캐닝 기술을 통해 부서지거나 소실된 뼈가 어떤 모양인지부터 파악한다. 그러고는 3D 프린팅 기술로 없어지거나 손상된 부위를 채울 부분을 출력해낸다. 특히 최근에는 뼈를 만드는 소재 기술까지 빠르게 발전돼 단순 금속이나 세라믹 소재를 사용할 때보다 이식 후 염증이나 감염에 대한 안전성이 크게 향상됐다고 한다. 실제로 2023년 한국 3D 바이오프린팅 기업 티앤알바이오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두개골이 함몰된 우크라이나 환자 두 명을 위해 두개골 일부분을 제작해 현지로 보내기도 했다.
뼈처럼 기존 역할을 완벽에 가깝게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귀나 코 같은 얼굴 일부분도 바이오 프린팅으로 만들 수 있다. 바이오 프린팅을 활용한 성형수술인 셈이다. 선천적이든 사고로 인한 것이든 얼굴 일부분이 없는 이들에겐 희망적인 소식이다. 특히 이 기술은 본인의 세포를 콜라겐 기반 물질과 혼합해 만들기 때문에 거부 반응이 없고, 연골까지도 제작 가능하다. 지난해 미국 뉴욕의 재생의학 기업 3D바이오테라퓨틱스는 선천적으로 작은 귀를 갖고 태어난 20대 여성의 귀를 새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장기·조직 이식은 20~30년 더 걸릴 듯
그러나 뼈나 얼굴 일부 부위가 아닌 신체 장기를 만들어 이식하는 데엔 상당한 시일이 더 걸릴 전망이다. 현재로선 줄기세포를 기반으로 한 오가노이드(organoid·미니 장기)를 만들고, 이를 통해 해당 장기가 어떤 독성 물질에 취약하다든지 어떤 상황에 암에 잘 걸리는지를 확인하는 데 바이오 프린팅이 활용되고 있다. 호주에서 바이오 프린팅을 통해 턱뼈 재건 수술을 성공한 적 있는 사소 이바노브스키 퀸즐랜드대 교수는 뉴질랜드헤럴드 인터뷰에서 “심장은 특히 실제 이식에 이르기까지 시일이 가장 오래 걸릴 장기 조직일 것”이라며 “앞으로 20~30년은 더 걸릴 것이라는 게 학계의 중론”이라고 했다. 미키17 영화의 배경인 2050년대에 이르러야 이식 가능한 인공 장기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장기나 조직 부위 중에서도 이식에 성공했거나 이식을 목전에 두고 있는 몇몇 부위가 있긴 하다. 소변을 저장하는 비교적 단순한 역할을 하는 방광은 이미 방광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이식에 성공했다. 피부나 각막 역시 멀지 않은 미래에 이식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피부나 각막은 모두 동물 실험에 성공한 상태다.
◇뇌는 스캔조차 어려운 최종 과제
신체 부위 중에서도 뇌는 바이오 프린팅의 마지막 도전 과제로 꼽힌다. 미키17에서도 주인공 미키의 뇌만은 저장해 놓은 생체 정보대로 출력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추가적인 기억 업데이트를 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기억 복제’라는 소프트웨어 기술까지 향상돼야 비로소 온전한 뇌 복제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만 뇌와 관련한 기술 수준은 걸음마 단계다. 현재로선 뇌 기능을 연구하기 위해 뇌혈관이라든지 뇌 조직을 일부 프린트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로 여겨진다. 더구나 아직은 뇌 구조를 속속들이 스캔해 내는 기술조차 없다. 지난해 미국 프린스턴대 세바스찬 승(승현준) 교수와 말라 머시 교수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 ‘플라이 와이어(FlyWire) 컨소시엄’이 초파리 성체의 뇌 지도를 처음으로 완성해 공개해 뇌 연구 분야의 큰 진보를 이뤄냈다. 그럼에도 초파리의 뇌는 인간보다 1000만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아직 인간 뇌 복제의 길이 멀다는 뜻이다.
뇌의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기억·생각을 복제해내는 것과 관련해선 뇌 속 정보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선결 과제로 꼽힌다. 뇌에 칩을 장착해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할 수 있게 하는 기업 뉴럴링크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언젠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진 않은 상태다. 마이클 그라치아노 프린스턴대 신경과학과 교수는 “인간의 뇌를 업로드하려면 피험자를 죽이지 않는 스캐너가 필요한데 그런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낙관적인 예측이라 해도 수십 년 뒤에 생각 업로드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몇 세기가 걸려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부자만 건강해지는 윤리적 문제도
바이오 프린팅 기술이 언젠가 현실화되더라도 윤리적 문제도 적잖을 전망이다. 장기를 인공적으로 만들면 미국에서만 10만명(한국 1만명)이 넘는 장기 이식 대기자에게 희망이 생기겠지만, 인공 장기의 비용마저 저렴하리라는 보장이 아직은 없다. 특히 개인의 신체를 스캔해 맞춤형 장기를 맞추는 이 기술의 특성상 규모의 경제가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부자만 장기를 갈아 끼우며 건강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SF 영화 ‘아일랜드’에선 부유한 사람들이 복제된 인간을 장기 기증자로 사용하는 사회를 묘사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다른 사람의 장기나 세포를 활용해 자신의 몸을 업그레이드하려는 경우, 이를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바노브스키 교수는 “병에 걸리거나 빠진 기능이 있는 것을 대체하기 위해서 이 기술을 쓰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기능을 넘어선 ‘성능’ 향상을 위해서 쓴다면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스포츠 선수가 그렇게 한다면 괜찮을지까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