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다마치역 벽면에 설치된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의 회견’이란 대형 미술 작품. /일본교통문화협회 홈페이지

도쿄만에 접해 도쿄의 관문으로 통하는 시나가와(品川). 이곳에서 도쿄역 방향으로 두 정거장을 이동하면 다마치역이 나온다. 개찰구를 나와 게이오대 방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향하면 옆 벽면에 길이 5m, 높이 3m짜리 대형 미술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도자기 부조와 유리 모자이크를 혼합해 제작된 이 작품의 제목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쓰 가이슈의 회견’. 제목을 알고 나니 두 남성이 마주 앉아 대화하는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사이고는 ‘메이지 유신 3걸(傑)’ 등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가쓰는 상대적으로 낯설다.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사이고와 대화하는 모습이 이렇게 예술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가쓰는 1823년 도쿄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무 살 무렵 서양의 대포와 세계지도를 접하고 큰 자극을 받았다. 이후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직접 네덜란드어 학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 수뇌부는 개국이냐 쇄국이냐를 두고 넓게 의견을 수렴했다. 이때 그가 제출한 ‘해방(海防) 의견서(서양식 병학교 설립과 정확한 번역서 간행의 필요성을 주장)’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막부(무사 정권)의 가신이 됐다. 그는 1860년엔 군함에 올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미국의 발전상에 놀란 그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강력한 해군을 반드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68년은 용의 해, 무진년이었다. 무진(戊辰)의 일본어 발음은 보신. 그래서 그해 일본에서 벌어진 내전을 ‘보신전쟁’이라 부른다. 1867년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大政奉還·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을 선언하며, 정권은 반납했으나 실세로 남아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신정부파는 1868년 초 요시노부를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왕정복고 대호령’을 발표했고, 일본 정국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요시노부는 미국과 영국 등 여섯 개국 공사를 오사카로 불러 ‘외교권은 여전히 막부가 보유한다’는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자 다급해진 신정부파는 막부를 자극했고, 결국 교토 주변에서 양측의 전쟁이 시작됐다.

숫적으로 열세였던 신정부군은 첫 전투에서 승리하며 기세를 올렸고, 동쪽으로 계속 진격해 에도(오늘날의 도쿄)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에도는 인구 100만명이 모여 사는 일본 최대의 도시였으며, 막부군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런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서 막부 측의 최종 조정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바로 가쓰였다.

그는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신정부파와 막부파의 충돌이었지만,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의 대리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 신정부파의 주축인 조슈번의 배후에는 영국이 있었고, 막부의 뒤에는 프랑스가 있었다. 전쟁의 피해가 커질수록 외국의 먹잇감이 될 위험도 커진다는 점을 그는 꿰뚫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도 시민은 결국 같은 일본인 아니던가.

협상은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의 도쿄 거점, 즉 창고 겸 거주지에서 열렸다. 신정부군의 리더 사이고가 사쓰마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현재의 다마치역 부근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그 작품이 다마치역에 설치된 것이다. 협상은 원만히 마무리됐고, 에도 성문은 평화롭게 열렸다. 이를 ‘에도 무혈 개성’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사이고는 신정부를 위해, 가쓰는 막부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두 신념이 충돌할 때는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좇아야 한다. 신정부 체제보다도, 막부 체제보다도 그들에게 더 소중했던 것은 일본의 미래였다. 일본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진정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각 진영의 리더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신현암 팩토리8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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