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미국의 유럽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한 안보 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됐습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주한 독일대사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게오르그 슈미트 주한 독일 대사는 이같이 말했다. 안보 위협에 깨어난 독일이 군비 허리띠를 풀겠다고 한 이유가 이 한 문장에 녹아 있었다. 최근 독일 의회는 신규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0.35%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던 ‘부채 브레이크’를 완화하고, 특히 국방비에 한해서는 사실상 부채 한도를 없애는 내용의 기본법(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 친(親)러시아 제스처를 나타낸 동시에 유럽이 스스로 유럽의 안보를 책임질 것을 요구하자 서둘러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세계가 유럽의 재무장에 주목하는 가운데 슈미트 대사는 이날 “‘부채 브레이크’를 푼 건 많은 부채를 지는 데 굉장히 신중한 문화가 있는 독일 정치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등 국제 정세 때문에 독일은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을 받았다”고 했다.
◇“유럽 안보를 더 책임지겠단 신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벌이며 2022년 이미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했고, 올해도 국방·안보 분야에 국가 전체 지출의 41%를 쏟아부을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유럽 방위에서 발을 빼려고 하면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슈미트 대사는 “지금 러시아가 (인접한) 발트 3국뿐 아니라 폴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에 굉장히 공격적인 수사를 쓰는 등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이 훨씬 강력해졌다”고 했다.
반면 현재 독일의 방위 능력은 기대에 못 미치는 상황이다. 독일 정부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연방방위군(분데스베어) 병력은 18만여 명으로 줄어 2031년 목표하는 20만3000명으로 증원 계획 실현이 불투명한 상태다. 더구나 군인 평균 연령은 34세로 고령화됐고 필수 장비가 부족하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다. 1990년 통일 이후 30년 넘게 독일은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을 1%대로 유지하며 국방력 강화에 소극적이었다. 다만 GDP 대비 국방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상승해 지난해 2%를 넘어섰고, 독일 정치권에서는 이번 개헌을 계기로 이 비율을 2027년 3.5%까지 늘려 약화된 군사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소련 붕괴 이후 군비 축소와 동시에 유럽 대륙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면서 자체 방위력이 약해진 상태다. 유럽연합(EU)은 독일의 군비 증강 계획과 별개로 지난달 19일 ‘대비 태세 2030’을 발표하며 재무장을 선언했다. EU는 향후 5년 동안 8000억유로(약 1280조원)를 투입해 EU 회원국의 무기 보유를 늘리고 유럽산 방산 제품 구매에 나서는 ‘바이 유러피언’(Buy European) 정책을 쓰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독일의 군비 증강과 맞물려 유럽 스스로 대륙의 안보를 책임지는 데 상승작용을 일으킬 전망이다. 슈미트 대사는 “(개헌은) 독일이 방위력을 강화해 유럽 동맹의 안보에 보다 큰 책임을 질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를 대외적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방 예산은 우크라 지원에도
늘어나는 국방 예산의 일부는 우선 우크라이나 지원에도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슈미트 대사는 “독일은 이미 유럽 국가들 가운데 우크라이나에 가장 많은 지원을 하는 나라”라며 “우크라이나가 (휴전 등)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도록 앞으로도 매우 분명하게 무기 등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는 “독일은 우크라이나가 참여, 동의하는 상태에서 전쟁 협상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전쟁 협상은) 유럽의 안보에도 굉장히 중요하므로 유럽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 갖고 있던 ‘독일의 군비 증강과 팽창’에 대한 트라우마도 희미하게 할 정도란 게 독일 대사 설명이다. 슈미트 대사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 군대를 외국에 파병한다는 건 금기시돼 왔지만, 지금은 2차 대전 중 독일의 점령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폴란드조차 독일이 유럽 안보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