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일러스트=김영석

“코로나 때 줄어든 부서 인원은 그대로인데, 관리자가 되니 업무량과 책임만 늘어나고 일하는 시간 대비 실질적인 수입은 줄었어요.”

최근 평사원에서 관리직으로 승진한 일본 직장인이 지난해 9월 리크루트워크스 연구소와 익명으로 한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출세한 직장인의 상징이자, 부하 직원들이 동경하던 관리직(管理職)을 되레 기피하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설문에서 일본은 물론 한국과 미국에서도 “임원(관리직) 되기 싫다”는 답이 과반이었다. 왜 그럴까. WEEKLY BIZ가 이런 현상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관리자는 ‘극한 직업’

일본은 최근 관리직 기피가 유독 두드러진 나라로 꼽힌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전국 직장인을 설문 조사해 보니 비(非)관리직 직장인 중 “관리직이 되고 싶지 않다”는 비율이 77.3%였다고 보도했다. 직장인 10명 중 8명이 승진보다 ‘만년 사원’이 되기를 선호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일본 관리직 직장인 과반(52.5%)은 “최근 업무 부담이 크게 늘었다”고 답했다.

일본 관리직의 업무를 늘린 요인으로는 2010년대 후반 일본 정부 주도로 추진한 ‘일하는 방식 개혁’이 꼽힌다. 일본 정부는 2019년 4월부터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직장인의 잔업(야근) 시간 상한을 월 45시간, 연 360시간으로 잡았다. 이렇듯 일반 직장인 업무는 주는데, 관리자들에겐 ‘파워하라(지위를 이용한 갑질)’ 등을 들여다보는 컴플라이언스(준법) 업무 등까지 보태져 업무량이 쌓이는 실정이라는 게 현지 언론 설명이다.

그래픽=김의균

나아가 저출산으로 인한 인력난까지 가중되자 관리직 승진자는 관리직 업무에 본래 맡았던 업무까지 해내야 하는 상황이다. 관리직이 부하 직원을 관리·감독하는 업무는 물론 승진 전에 하던 업무까지 해내야 하는 ‘극한 직업’으로 내몰린다는 얘기다. 일본 인재 서비스 기업 맨파워그룹은 “시간 외 노동 규제의 취지는 생산성을 올려 노동 시간을 줄이겠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여의치 않아 관리직이 (근무시간을 속이고) 부하 업무를 인수받아 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는 이에 “직장인들에게서 ‘관리직은 사실상 벌칙’이란 말이 나온다”고 전했다.

일본의 관리직 기피를 부추기는 원인으로는 고질적 저임금 문제도 거론된다. 일본 내각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임금 인상률은 29세 이하에서 4.2%, 30대가 3.6%, 40대 2.7%, 50대 1% 등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떨어지는 추세였다. 관리직이 되면 업무량은 크게 느는데 임금은 찔끔 올라, 차라리 승진하는 대신 ‘현상 유지’를 택하겠다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MZ 직장인 “승진보다 ‘워라밸’”

관리직 승진을 기피하는 ‘오피스 피터팬’ 현상은 젊은 층일수록 두드러지는 추세다. 관리직을 발판 삼아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성공 지표로 여긴 과거와 달리, ‘워라밸(업무와 개인 일상의 균형)’을 중시하는 요즘 직장인 세태가 이러한 현상을 부추겼다는 해석이다.

다국적 채용 컨설팅 기업 ‘로버트 월터스’는 지난해 말 미국의 Z세대(1997~2012년 출생) 직장인을 대상으로 관리직 승진 희망 여부를 조사한 결과 52%가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미국 직장인 10명 중 7명은 “후배 직원을 육성하기보다 나 자신의 성장에 시간을 쓰고 싶다”고 했다. 로버트 월터스 관계자는 “회사에 헌신하며 존경받는 상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던 과거 직장인과 달리 (코로나 때 확산한) 재택근무 방식으로 사회에 진출한 젊은 층은 자기 능력을 개발하는 데 더 집중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HR 기업 잡코리아가 지난해 발표한 설문에서도 국내 MZ세대 직장인 54.8%가 “임원(관리직)까지 승진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승진할 생각이 없다는 이들 중 44%는 “책임을 지는 위치가 부담스럽다”고 했고, 13.3%는 “임원은 ‘워라밸’이 불가능할 것 같다”, 10%는 “회사 생활을 오래 하고 싶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다만 Z세대의 관리직 기피 이유를 높은 업무 강도나 책임을 지기 싫다는 점 한 가지로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설명도 있다. 조직 문화 전문가인 김태수 IGM(세계경영연구원) 부본부장은 “Z세대의 관리자 기피는 국내 기업들이 젊은 사원들에게 ‘관리자가 되면 이런 역할은 한다’는 사내 교육을 소홀히 한 탓도 있다”며 “관리직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젊은 사원들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관리직을 기피할 수 있다”고 했다.

◇관리직은 정리 해고도 1순위

전문가들은 중간 관리자들이 정리 해고의 과녁이 된다는 점도 글로벌 관리자 기피의 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미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2023년 미국에서 해고된 직장인의 3분의 1(31.5%)은 중간 관리자였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부진에 부닥친 2023년 3월 중간 관리자들을 대상으로 “일반 사원으로 돌아가거나 회사를 그만둬라”라고 선언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2022년 트위터(지금의 X)를 인수한 뒤 급여가 높은 관리직을 중심으로 6000명 규모의 대량 해고를 단행했다.

미국에선 기업 차원 칼바람도 이어지고 있다. 아마존은 관리직 1만4000명을 줄여 연간 약 35억달러를 절감하려 하고 있다. 이 밖에도 기술·제조·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에서 대규모 구조 조정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자동화와 인공지능(AI) 도입, 경제적 불확실성,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가속되고 있다.

캐나다의 인재 관리 전문가 마틴 폭스는 “관리직 기피 현상이 아무리 확산하더라도 이들이 기업의 초석이자 필수 인재임은 부정할 수 없다. 고용주들은 관리직에게 (관리 업무에 집중할) 자율성, 육성·감독 기술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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