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관문인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은 새벽부터 내·외국인 수천명이 몰리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항공기 트랩에는 서로 먼저 타려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매달리다가 떨어지기도 했다.

대통령궁서 승리 즐기는 탈레반 - 15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을 점거한 뒤 집무실로 몰려간 탈레반 대원들의 모습. 이날 아프간 정부는 카불을 장악한 탈레반에 항복했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으로 도망쳤다고 알 자지라 방송은 보도했다. 탈레반은 2001년 아프간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축출된 지 20년 만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게 됐다. /AP 연합뉴스

공항 주변 도로는 수백 대의 차량이 엉키면서 마비가 됐다. 이런 장면은 장년층에게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를 떠올리게 했다.

미국이 대사관을 옮긴 카불 공항에서 미군이 총을 쐈다는 목격담과 외신 보도도 잇따랐다. 이날 CNN은 “미군이 무장 병력 2명을 사살했다”고 보도했고, 영국 일간 가디언도 “카불 공항의 미군이 총격 사실을 시인했다”고 전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시민들이 패닉에 빠져 공항을 향해 달려가고 미군은 시민들이 흩어지도록 하늘로 총을 발사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슬프다”고 썼다. 로이터통신은 목격자를 인용, 이날 공항에서 최소 5명이 숨졌다고 했다. 사망자가 압사에 의한 것인지, 총격에 의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륙을 위해 공항 활주로로 이동하기 시작한 미 군용기에 주민 여러 명이 매달려 있는 아찔한 장면이 담긴 동영상도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빠른 속도로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면서 현지 시민들은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다. 탈레반은 이날 “아프간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5일 밤 탈레반이 장악한 수도 카불 현지 표정에 대해 “기이할 정도로 황량한, 버려진 도시 같다”고 했다. 겁에 질린 현지 주민 대부분은 집 안에 틀어박혀 숨죽인 채 탈레반의 입성을 지켜봤다고 한다. 부랴부랴 귀가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이날 오후 시내 택시는 모두 만차였고, 기사들은 평소의 5배가 넘는 금액을 불렀다고 한다. 은행과 식료품점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긴급 상황을 대비해 현금을 찾고, 비상 식량을 사재기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카불 시내의 밀가루 가격은 며칠 새 40~50%가량 급등했다.

16일(현지 시각)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을 이륙한 미군 C-17 수송기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물체(원 안)가 추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과 관련해 톨로뉴스 등 일부 현지 언론은“미군 수송기 바퀴를 붙잡고 매달려 있던 3명의 청년이 떨어져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트위터

누구보다 여성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탈레반은 과거 집권 당시 여성 교육 금지, 취업 활동 제한, 부르카(눈을 망사로 덮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복장) 착용 강제 등 극단적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며 여성 인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탈레반은 카불에 입성하면서 “히잡을 쓴다면 여성은 학업 및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를 믿는 주민들은 없다. 카불이 함락된 뒤 일부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중교통과 차량을 이용하려 했지만 거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을 차량에 태운 것으로 탈레반의 오해를 살까 봐 운전수들이 애초에 여성 탑승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한 20대 여성은 가디언에 “내가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분증과 대학 졸업증을 숨긴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금기시해온 ‘교육받은 여성’으로 낙인찍혀 탄압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탈레반의 집권이 가시화되면서 일부 지방에서는 한동안 팔지 않던 부르카 판매를 시작했고,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도 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 톨로뉴스TV 대표인 로트풀라 나자피자다는 이날 카불 시내를 찍은 사진 한 장을 트위터에 올렸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이 그려져 있던 벽화를 한 남성이 흰 페인트로 칠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에 대해 “이미 현지 방송에서 팝(대중음악)과 여성이 사라졌다” “카불에서 지옥이 펼쳐질 것” “비극이다”라는 반응도 달렸다.

국가 지도자로부터 버림받은 국민은 모든 희망을 잃은 듯 자포자기했다. 아프간 정부군이나 나토군으로 복무했거나 미국에 협력했던 이들도 불안에 떨고 있다.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는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자 보복을 우려해 지체 없이 군복을 벗어던졌다. 카불에 앞서 함락된 아프간 제2 도시 칸다하르에서는 탈레반이 민가를 이 잡듯이 뒤지며 정부군 및 협력자 숙청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카불 주민들은 “머지않아 탈레반이 ‘배신자’를 색출해 숙청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