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이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분야 패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대만 정부가 중국의 ‘반도체 인재 사냥’을 막기 위해 대만인의 중국 대륙 내 취업을 엄격히 제한하기로 했다. 인력 업체가 중국 일자리를 소개하거나 광고하는 것을 금지하고, 위반할 경우 최고 500만 대만달러(약 2억원)의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이는 최근 들어 중국의 대만 인력 빼가기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은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TSMC를 보유하고 있다.
대만중앙통신사에 따르면 대만 노동부는 최근 취업 사이트와 헤드헌팅 업체에 공문을 보내 중국 내 일자리 채용 공고를 내 인력을 모집하거나 중국 취업을 알선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지시를 어기고 채용 공고를 내는 경우 최고 50만 대만달러(약 2000만원), 취업을 중개하는 경우 최고 500만 대만달러의 벌금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동부는 공문에서 “미·중 과학 기술 전쟁의 영향으로 중국 반도체 산업 발전에 지장이 생겼고, 중국이 독자 공급망 구축을 위해 연구·개발 경험이 풍부하고, 같은 언어를 써 관리가 쉬운 대만 반도체 인재를 빼내가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만 정부 지침이 내려진 이후 대만 취업 사이트인 ‘예스123’는 지난 29일 200여개 중국 관련 채용 공고를 삭제했다. 또 다른 취업 사이트인 ’104 인력은행'도 지난 28일 자사 사이트에 중국 채용 공고를 올린 기업들에게 이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고 하루 만에 중국 관련 일자리 광고가 3722개에서 1872개로 줄었다고 전했다. 광고가 다 없어지지 않은 이유로 이를 올린 기업 중에 중국 기업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번 조치는 최근 대만이 범정부 인력 유출 방지 회의를 개최한 후 내려졌다. 대만은 정부 조례에 따라 대만 취업사이트나 헤드헌팅 업체가 중국 내 일자리를 광고·알선하는 게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지만, 중국과 교류 촉진, 대만인의 취업 기회 확대 차원에서 사실상 허용해왔다. 천스창(陣世昌) 대만 노동부 취업서비스팀장은 대만중앙통신사에 “최근 몇 달간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의 대만 인력 빼가기가 가속화되고 있고, 이런 현상이 국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대만 산업 경쟁력에 위협이 될 수 있어 엄격히 관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중국 본토에 투자한 대만 기업이 본토로 인력을 파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정부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일본 닛케이 아시아는 이번 대만 정부 조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좇아 중국 본토에 취업한 대만인들은 물론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TSMC, 폭스콘 등 대만 기업에도 어느 정도 타격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럼에도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간의 긴장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대만이 자국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내린 고육책이라는 것이다.
대만의 정책은 최근 미국의 대중 정책과 호흡을 같이한다는 측면도 있다. 지난 1월 들어선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를 중국과의 안보 경쟁에서 핵심 분야로 보고, 반도체 공급망에서 동맹·우호국들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이 이끄는 대만 행정부도 이런 미국의 전략에 전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2일 백악관에서 화상으로 열린 반도체 공급망 강화 회의에 미국 업체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대만 TSMC 등을 초청했다. 이날 회의는 미국 내 반도체 생산 라인을 늘려달라는 취지지만 미국이 앞으로 중국과의 반도체 거래를 제약할 가능성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 공산당은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공격적인 계획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미 의회 서한을 소개하고,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회의에 참석시킨 것도 반도체 정책을 대중(對中) 안보 문제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편, 오는 2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도 반도체 문제가 핵심 의제 중 하나로 다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