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순 이후 대만에서 코로나가 급격히 확산한 가운데 대만에 백신을 공급하는 문제가 중국과 대만, 중국과 일본의 외교전(戰)으로 비화하고 있다. 백신 조기 확보에 실패한 대만 정부는 안팎으로 휘둘리는 모양새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은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에서 대만에 코로나 백신을 제공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사토 마사히사(佐藤正久) 일본 자민당 참의원도 같은 날 “대만도 우리가 필요했을 때 마스크 200만장을 보냈다”며 대만에 백신 제공을 촉구했다. 일본은 자국에 공급하기로 한 영국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대만에 보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부작용 우려 때문에 AZ 백신 접종을 중단했지만 대만은 접종 중이다. 대만 정부는 “가뭄에 내리는 비”라며 반기는 입장이다.
올 들어 일본과 대만은 밀월 수준으로 밀착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의 반발에도 4월 미국, 5월 유럽연합(EU)과 각각 가진 정상회담에서 대만 문제를 연이어 거론했다. 미·중이 반도체 전쟁을 선포한 가운데 일본 정부는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에 2000억원을 지원해 일본 내 TSMC 연구개발 거점 조성을 돕기로 했다. 여기에 백신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대만에 백신을 제공해 일·대만 관계를 한층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중·일 관계를 취재하는 한 일본 언론인은 “대만을 잃으면 일본이 직접 중국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크다”고 했다.
중국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왕원빈(汪文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31일 기자회견에서 대만에 백신 지원을 고려한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해 질문을 받고 “일본은 자국 백신 공급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며 “백신 지원이 정치적 사익(私益)을 도모하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일본 지지통신은 “일본과 대만이 가까워지자 중국의 경계감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중국과 일본은 올 들어 쿼드(미·일·인도·호주의 안보 협력체), 후쿠시마 원전 폐수 방류,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인근 중국의 해상 정찰 등 문제를 놓고 연일 충돌하고 있다.
대만 백신 문제는 중국과 대만 관계에서도 핫이슈가 되고 있다. 중국은 대만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자 백신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대만 민진당 정부가 “중국의 통일전선 전술”이라며 거절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대만과 가까운 중국 지방정부, 의료 단체들까지 백신과 의료 물품을 지원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대만 야당인 국민당도 중국의 제안에 호응하고 있다. 국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중국산 백신 구입을 요구하고 있고, 국민당 산하 조직인 ‘쑨원학교’도 중국으로부터 백신을 도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중국은 이런 국민당의 요구를 거론하며 재차 대만에 중국 백신을 받으라고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또 다른 ‘국공(國共) 합작’이 시작됐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국민당은 1937~1945년 일본 침략에 공동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공산당과 합작을 했지만 일본 패망 후 벌어진 내전에서 공산당에 패해 1949년 대만으로 이주했다.
대만 정부는 미국 모더나 백신 등을 8월까지 1000만회 분량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당장 확보한 백신이 부족해 중국과 야당의 공세에 시달릴 전망이다. 백신 도입을 둘러싼 대만 내부 갈등도 계속될 분위기다. 리위안더 전 대만대 병원장은 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중국 백신을 들여오자는 사람들에 대해 “깃발을 흔들고 고함을 지르며 적의 바둑알 노릇을 하는 사람에 분노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