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 사는 기자는 최근 새벽 1시 갑작스러운 복통에 잠을 깼다. 구급상자엔 약이 없었다. 평소 배달 음식을 주문할 때 쓰던 전자상거래 앱(휴대전화 응용 프로그램) ‘메이퇀(美團)’을 열었다.
급해도 아무 약이나 주문할 수 없어 ‘상담’ 버튼을 눌렀다. 채팅창에 경력 24년의 약사 안(安)모씨가 연결됐다. 안씨는 그날 먹은 음식, 증상, 평소 먹는 약이 있는지 세세하게 물었다. 한국에서 약을 사면서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눴던 적이 없었다. 상담이 끝나자 휴대전화에 안씨가 추천하는 약과 문을 연 주변 약국 이름이 떴다. 약국마다 다른 약값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약이 퀵서비스로 집에 도착하는 데 딱 15분 걸렸다.
이런 서비스는 메이퇀 같은 전자상거래 업체가 원격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가능해졌다. 불과 2~3년 사이에 일어난 대변화다. 이 시장에서는 알리바바, 징둥(京東) 등 중국의 1, 2위 전자상거래 업체는 물론 보험사도 뛰어들고 있다.
중국 핑안(平安)보험 계열사가 운영하는 앱 ‘핑안건강’은 가입 회원만 3억7000만명이다. 이 앱은 중국 도시 379곳의 약국 15만곳, 의사 2만여명, 제약사 1000여곳을 연결한다. 365일 24시간 의사와 문자나 전화로 상담할 수 있고, 온라인으로 약은 물론 건강보험 상품도 구입할 수 있다. 과거 진료 기록, 약 구매 기록을 참고해 인공지능(AI)이 건강 관리 조언도 해준다.
2019년 서비스를 시작한 징둥의 건강 앱인 ‘징둥건강’은 요즘 의사와 문자 상담할 수 있는 서비스를 1위안(약 170원)에 할인 판매 중이다. 원래 가격은 450위안(약 7만8000원). 징둥은 상담 의사를 자체 고용하면서 동시에 중국 전역의 의사들과 계약을 맺고 원격진료를 중개한다. 징둥건강에만 이런 의사가 11만명이다. 가격은 의사와 서비스에 따라 세분돼 있다. ‘명의(名醫)’로 분류된 베이징 차오양(朝陽)병원 소화기내과 전문의인 류정신 주임의사는 문자 상담이 200위안(약 3만5000원), 전화 상담은 15분에 499위안(약 8만7000원), 화상 상담은 15분에 999위안(약 17만4000원)이다. 의사에 대한 환자 평가도 공개된다.
중국과 미국 등에서 원격의료가 급격히 대중화된 것은 빅데이터로 무장한 IT 기업이 잇따라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사회, 경제 분야의 디지털 혁신은 의료 분야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특히 원격의료는 예약 환자들이 내원하지 않는 노쇼(no show), 병원 내 감염 등을 줄여 병원의 운영·행정 부담도 덜어주는 장점도 있다. 중국에서는 원격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이미 25만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환자들의 저렴한 가격, 신속한 진료에 대한 희망이 편안한 환경에서 진료하고 싶어하는 의사들의 바람과 만나 새로운 의료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격의료의 원조인 미국에서는 이런 변화가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은 자사 직원을 대상으로 했던 원격의료 서비스 ‘아마존 케어’를 최근 일반인 상대로 확대했다. 구글도 원격의료가 대세가 되자 비슷한 서비스를 늘렸다. 이달 초 월마트는 24시간 원격의료 업체 미엠디를 인수해 전국에서 원격의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고, 양대 약국 체인인 월그린스와 CVS도 자체 원격 진단·처방 서비스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원격의료 시장은 봇물 터지듯 커지고 있다. 미국에선 의사와 환자를 연결하는 ‘의료 유통 전문’ 플랫폼 업체만 300곳이 넘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019년 한 해 이런 플랫폼에 대한 투자는 60억달러(약 6조6500억원)였는데, 2020년에는 상반기에만 100억달러(약 11조원)가 몰렸다. ‘K헬스’는 웬만한 질환의 초진비를 19달러(약 2만원)로 통일한 서비스를 내놓았고, ‘갈릴레오’는 불안·우울증 상담 기본료를 9달러(약 1만원)로 묶었다. ‘GoodRX 케어’는 피임약과 발기부전 진단·처방을 10~30달러에 해주고 있고, ’98Point6′은 환자 상태와 요구를 AI로 분석해 최적의 의사를 찾아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