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90%가 파괴된 우크라이나 남부의 최대 철강∙항구 도시인 마리우폴. 현재 우크라이나군은 이 도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11㎢(약 330만 평)의 면적의 ‘아조브스탈 철강공장’을 최후 거점 삼아 버티고 있다. 주변은 이미 러시아군에 장악됐다.
이 곳에서 항전하는 우크라이나 해병대 제36연대 소속 지휘관인 세르히 볼리나 소령은 20일 페이스북 동영상 메시지에서 “세계에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가 될 것”이라며 “며칠, 몇 시간이 남았더라도, 명령이 없는 한 절대로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은 20일 오후2시(한국시간 오후8시) 두 번째 항복 시한으로 제시했지만, 우크라이나군 중에서 5명만 항복했다고 발표했다.
볼리나 소령은 이 메시지에서 “러시아군은 육상∙공중∙무기∙탱크∙포에서 우세하며, 10대의1의 병력으로 우리를 압도한다”며 “내게는 500명의 부상당한 병력과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백 명의 민간인이 있다”고 밝혔다.
현재 이 공장 부지 내에 남아 있는 우크라이나군의 병력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영국 더 타임스는 3000명 정도로 추정했다. 볼리나 소령은 해병대와 우익 민병대인 ‘아조프 대대’, 경찰관, 경비원 등으로 구성된 이 공장 내 병력의 한 지휘관이다.
러시아군은 투항을 권유하면서 “항복하면, 생명과 안전, 의료 조치를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볼리나 소령은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우리 병력은 불과 며칠, 몇시간 버티지 못할지 모르지만, 명령을 받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전투를 수행하며 임무를 완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탄약도 거의 떨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볼리나 소령은 페이스북 메시지에선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신할) 인도적 통로를 만들어 줄 것을 전세계 지도자들에게 요청한다”고 말했다.
◇마리우폴, 크림반도~동부 돈바스 잇는 육로의 핵심 도시
마리우폴을 장악하면, 러시아는 2014년에 침공해 강제합병한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을 잇는 육로를 확보하게 된다. 마리우폴은 또 곡물∙철강∙중(重)기계류를 수출하는 아조프해의 최대 항구다. 또 러시아군이 남쪽의 마리우폴과 북쪽의 이지움에서 각각 치고 들어가면, 현재 돈바스 지방의 서쪽에서 러시아군과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군 주력 부대는 포위되고 만다. 따라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이곳을 장악하면, 러시아로서는 지금까지의 부진을 씻고 ‘상징적인’ 승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 탓에, 러시아군은 지난 2월 개전 초부터 마리우폴에 대한 잔혹한 폭격을 거듭했다.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와 북부 도시 카르히우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면서, 마리우폴은 도시의 90%가 파괴되고 인구 45만 명 중 2만1000명이 살해되는 등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가장 처참한 광경을 빚고 있다. 지난 3월 9일, 지붕에 러시아어로 ‘어린이’라고 크게 썼는데도 러시아군이 폭격해, 300명 이상이 죽은 도네츠크 드라마극장도 바로 이 도시에 있었다.
◇철강 공장 지하는 ”핵 공격도 견딜, 도시 안의 지하 도시”
마리우폴 시의 거의 대부분을 빼앗긴 우크라이나군이 최후 보루로 버티는 아조브스탈 철강 공장은 유럽 최대 철강 생산 공장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 철강 생산의 3분의1을 차지한다. 1930년에 지은 이 공장은 2차 대전 이후에 재건됐다.
지난 2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돈바스 지역의 친(親)러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러시아 고문인 얀 가긴은 “이 공장은 핵 전쟁도 견딜 수 있게 두꺼운 강화 콘크리트벽과 철문으로 연결된 터널과 방, 통신 체계가 지하를 정교하게 잇는 도시 밑의 도시”라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약 330만 평의 면적에 철로와 작업실, 공장, 용광로, 각종 건물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러시아군은 이 공장을 아예 평평하게 만들 정도로, 폭격한다. 또 다른 우크라이나군 지휘관인 데니스 프로코펜코 중령은 최근 한 비디오 메시지에서 “벙커버스터 폭탄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폭탄과, 육상과 해상에서 포격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장 내에, 1000명의 민간인도 대피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 공장 내에는 수 주째 전기와 식수, 일상 필수품도 없이 1000명 가량의 민간인이 피신해 있다고 밝혔다. 이들 대부분은 무기를 든 공장 직원들의 가족이라고 한다. 공장 내 병원엔 어린이를 포함해 300명의 환자가 있다.
한때 45만 명이었던 이 도시 인구는 20만 명이 피난 갔고, 4만 명은 러시아군에 의해 강제로 러시아가 장악한 동쪽 돈바스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다. 또 2만1000명 이상이 숨졌다. 시 전역에는 10만 명 가량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정부 협상 관리들은 21일 “조건 없이” 마리우폴의 시민들에게 안전한 피난 통로를 제공하기 위한 “특별 협상”을 하자고 러시아 측에 제안했다.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이 거점에 대한 최후 공격은 잠시 멈추되, 파리 한 마리 못 빠져나가게 포위하라”고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에게 명령했다고, 유로뉴스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