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주변이 어두운 이른 아침, 호주 남부 애들레이드 시의 한 묘지에선 시신 발굴 작업이 전개됐다. 70여년 전 이름도, 사인(死因)도, 아무런 연고도 없이 숨진 채 발견돼 이 곳에 누워있던 이른바 ‘소머튼 남자(Somerton Man)’에 대한 재수사가 시작한 것이다.
◇'독살된 스파이' ‘암거래상’ ‘발레 댄서’ 등 억측만
1948년 12월1일 오전6시40분, 애들레이드시 외곽의 소머턴 비치(beach)에서 한 40대 백인 남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방파제에 머리를 기대고 술에 취해 잠든 듯한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반짝거리는 구두, 좋은 천으로 만든 양복 등으로 미뤄, 숨진 남성은 해변에서 술 취해 잠들 유형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갑, 돈, 신분증 어느 것도 없었다. 흥미롭게도 입고 있던 옷의 라벨(label)은 모두 제거됐고, 6주 뒤 역 보관함에서 발견된 그의 서류 가방에 있던 옷들도 라벨은 전혀 없었다. 그를 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지문(指紋)은 영미권 경찰에 퍼졌지만, 신원을 알 수 없었다.
경찰은 시신을 방부(防腐)처리하고, 얼굴의 모양을 밀랍 마스크로 떴다. 부검 결과, 위와 콩팥에 피가 몰렸고 지라는 평소 크기의 3배였다. 부검의사 소견은 ‘독살에 의한 심장마비’였지만, 어떠한 독극물 성분도 발견되지 않았다. ‘소머튼 남자’는 특이한 신체적 특징도 있었다. 발레 댄서나 장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장딴지 근육이 매우 발달했다. 발가락 끝은 뾰족하게 한 데로 모였다. 앞니는 몇 개 없고, 그 옆의 송곳니가 크게 자랐다.
옷의 라벨이 죄다 없는 것을 들어 본인과 주변인이 모두 노출을 꺼리는 암거래상이라는 둥, 독살된 스파이라는 둥 ‘소머튼 남자’의 신원을 놓고 온갖 추측이 돌았다. 호주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인 ‘소머튼 남자’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제 다 끝났다”는 뜻의 페르시아 시구(詩句) 쪽지
경찰은 나중에 그의 바지 속주머니 깊은 곳에서 ‘타맘 슈드(Tamam Shud)’라고 적힌 뜯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당시 유행했던 12세기 페르시아 시인의 시 ‘루바이야트’에서 나온 단어로, ‘끝났다(It is finished)’라는 뜻이었다. 경찰은 페이지가 뜯긴 시집을 수소문했고, 그 지역의 한 화학자가 자기 차 뒷좌석에 자신도 모르게 놓여 있던 이 시집을 찾아 신고했다. 그는 ‘소머튼 남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시집의 뒷장에는 영어 알파벳 대문자들이 나열돼 있었다. 당시는 냉전(冷戰)시절이라 수많은 암호해독 전문가들이 달라붙었지만, 아무도 풀 수 없었다.
그 책의 뒤엔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400m 떨어진 곳에 사는 27세 된 한 간호학과 여학생의 집이었다. ‘제시카 엘린 조 톰슨’이란 이 여성은 경찰이 보여준 사망자의 얼굴 윤곽 마스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자신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조 톰슨은 당시 한 남성과 결혼할 계획이었지만, 이 남성의 아이가 아닌 생후 1년 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조 톰슨은 2007년 죽을 때까지 경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소머튼 남자'의 손녀 추정 여성 찾았지만
애들레이드 대학의 전기공학과 교수인 데릭 애보트 교수는 2007년 이 오래된 사건을 잡지에서 읽고 관심을 가졌다. 이후 애들레이드대 법의학팀과 함께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의학적으로 ‘소머튼 남자’가 보인 치아발육부전증(hypodontia)는 인구의 2%에게서만 나타나며, ‘소머튼 남자’의 귀골 모양도 1~2%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모양새였다. 결국 두 특성이 함께 나타날 확률은 1만분의 1이었다. 2009년 애보트 교수는 ‘조 톰슨’을 찾았지만, 이미 그는 숨진 뒤였다. 그에게 있었던 아들 ‘로빈’도 수개월 전에 죽었다. 그러나 사진 속 ‘로빈’은 이 두 가지 특성을 다 갖고 있었다.
애보트 교수는 이후 뉴질랜드로 입양 간 로빈의 딸 레이철 이건(Egan)을 찾아냈다. 레이철에겐 친부(親父) 로빈의 이런 신체적 특징이 없었다. 하지만 생모로부터 친부 로빈을 호주 발레스쿨에서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린 시절 레이철도 발레에 흠뻑 빠졌다. 애보트 교수는 뜻밖에 레이철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
◇의문만 커지는 단서들 … “이제는 소머튼 남자가 ‘입’을 열어야”
‘소머튼 남자’의 장딴지 근육이 남성 발레 무용수처럼 발달했었고, 이 남자를 한사코 모른다고 했던 간호학과 여학생 조 톰슨이 낳은 아들 로빈도 생전에 발레 무용수로 일했었고, ‘소머튼 남자’의 신체적 특성을 빼다 박았다, 로빈의 입양 간 딸도 발레에 흠뻑 빠졌다. 사건의 ‘전체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소머튼 남자’는 옛 연인 조 톰슨을 찾아갔지만,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톰슨은 ‘소머튼 남자’를 박대했고, 결국 ‘소머튼 남자’는 실연(失戀)의 괴로움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애보트 교수가 아내 레이철의 동의를 얻어 DNA를 추적한 결과는 엉뚱했다. 레이철의 DNA는 할머니 조 톰슨이 실제 결혼한 남성의 할아버지와 닿아 있었다.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았다. 결국 호주 경찰은 2년 전 애보트 교수의 청원을 받아들였고, 19일 ‘소머튼 남자’의 시신 발굴과 재수사를 발표했다.
애들레이드시가 속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州) 법무장관인 비키 클랩먼은 시신 발굴을 허락하며 “‘소머튼 남자'는 그 동안 세계 많은 이의 상상력을 사로잡아왔지만, 그는 누구의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일 수도 있어서 이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법의학자들은 비록 ‘소머튼 남자’의 DNA가 그간 훼손됐다고 해도, 현대 기술로 사인(死因)과 가계도는 정확히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애들레이드대 법의학팀은 호주 언론에 “유해의 상태도 좋아 이번엔 해결할 희망이 커졌다”고 말했다. 애보트 교수는 “이제는 ‘소머튼 남자’가 스스로 밝혀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