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 흉상 앞의 해리스 美부통령 -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25일(현지 시각)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을 만나기 위해 수도 하노이의 주석궁에 도착해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1890~1969) 흉상 앞을 지나고 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맞서 남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원했지만,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철군했고, 북베트남은 1975년 4월 사이공을 함락시키며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했다. 미국과 베트남은 1995년 수교했다. /AFP 연합뉴스

동남아시아를 순방 중인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24일(현지 시각) 베트남 방문이 현지 미 대사관 직원에게 발생한 ‘아바나 증후군’ 의심 증상 때문에 약 3시간 지연됐다. 아바나 증후군이란 원인 모를 두통, 이명(耳鳴), 어지러움 등을 동반하는 증세다.

2016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 근무 중인 미국 외교관들에게서 처음 발견됐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쿠바 괴질이라고도 불린다. 미 정보 당국은 이 증상이 특정 세력의 ‘극초단파(microwave)’ 음향 무기 공격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이 해리스 부통령을 노린 것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백악관은 이날 “해리스 부통령의 건강은 아무 이상 없다”면서 이 증상이 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판단하느냐는 질문엔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날 해리스 부통령은 오후 4시쯤 싱가포르에서 베트남으로 출발하려 했지만, 돌연 비행기 탑승을 미뤘다. 이에 베트남 주재 미 대사관은 성명을 내고 “최근 하노이에서 ‘이상 건강 징후(anomalous health incident)’가 발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인지한 부통령 순방 대표단이 출발을 연기했다”고 했다. 시몬 샌더스 부통령실 대변인은 “(출발 지연은) 부통령의 건강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미 언론들은 아바나 증후군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측을 내놨다. ‘이상 건강 징후’라는 표현은 그간 미 정부가 아바나 증후군을 지칭할 때 자주 써왔던 용어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아바나 증후군', 자료=외신 종합

NBC뉴스는 “지난 주말 베트남 수도 하노이 주재 미 대사관에서 2명의 외교관이 아바나 증후군 의심 증상을 호소했다”고 보도했다. 이 외교관들은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대사관이 아닌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다 이상 증상을 겪었다고 한다. 미 정부는 해리스 부통령도 이들과 비슷한 증상을 겪을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해리스 부통령은 출발 예정 시각보다 3시간 지난 오후 7시 32분 싱가포르 파야레바르 공군 기지에서 베트남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 국무부는 “신중한 평가 끝에 부통령의 순방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2016년 쿠바에서 처음 발견된 뒤 비슷한 증상이 중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전 세계에서 근무 중인 미국 외교관 및 정보 당국자에게서 나타났다. 작년엔 미 국가안보회의(NSC) 당국자가 백악관 근처에서 비슷한 증세를 호소하는 등 미국 내에서도 발견됐다. 이달 들어 독일 베를린에서 근무 중인 미국 외교관들 중 최소 2명이 두통과 메스꺼움을 느껴 치료 받았으며, 미 정부가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미국은 2016년 이 증후군이 처음 등장한 이후, 국내외에서 외교관·정보 요원 및 가족 200여 명이 아바나 증후군을 겪은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러나 해리스 부통령과 같은 미 행정부 최고위층까지 이 증상의 ‘영향권’ 내에 들어오면서 미 정부가 긴장하는 분위기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아바나 증후군 관련 증상을 호소한 이들이 해리스 부통령과 동행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사키 대변인은 이 증상이 부통령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엔 “관련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다”고만 했다.

미 정보 당국은 아바나 증후군이 미 외교관 및 정보 요원들을 겨냥한 계획적이고 지능적인 공격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미 국가정보국장실(ODNI), CIA(중앙정보국) 등 17개 미 정보기관은 러시아 첩보 조직인 정찰총국(GRU)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합동 조사를 벌이고 있다. CIA도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을 쫓았던 베테랑 요원을 내부 태스크포스(TF) 수장에 앉히고, 윌리엄 번스 CIA 국장이 이 사안과 관련해 매일 브리핑을 받는 등 조사 강도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는 5~6년 전부터 극초단파로 사람의 뇌를 노린 무기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초단파의 주파수는 매우 촘촘해 철제와 콘크리트도 뚫을 수 있다. 또 극초단파는 사람의 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측두엽에 전달돼 뇌 신경을 손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미 정보 당국은 직접적인 증거를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도 관련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