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직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 펑솨이(彭帥·35)가 장가오리(張高麗·75) 전 부총리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간 중국 학계와 기업, 연예계에서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벌어져 왔지만 장 전 부총리처럼 권력 핵심 인사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 전 부총리는 시진핑 집권 1기 당시 중국 최고 지도부 가운데 한 명으로, 산둥성·톈진시 당서기(1인자)를 거쳐 2012~2017년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최고지도부)을 지내고 2018년 은퇴했다. 외신들은 폭로 배후에 정치 세력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일(현지 시각) “장 전 부총리와 같은 고위 지도자에 대한 공개적 비난은 거의 전례 없는 일이지만, 중국 공산당은 실각한 고위 관리들의 성적 비리를 폭로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 상하이방(上海幇) 출신의 저우융캉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 몰락할 때도 성적 스캔들이 가장 먼저 터졌다”고 지적했다. 검열 시스템이 가동되는 웨이보에서 중국 최고위층의 실명이 포함된 게시글이 사전 검열 없이 업로드 된 점도 이례적이라는 지적이다. 장 전 부총리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이끄는 세력의 경쟁 파벌로 간주되는 상하이방 계열 인사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오는 8일 중국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전회)와 내년 20차 당 대회를 앞두고 시 주석이 견제 세력 숙청에 나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6중전회에서는 시 주석의 역사적 지위를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 반열에 올릴 예정이고, 20차 당 대회에서는 시 주석의 3연임이 결정된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시 주석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란 지적도 있다. 장 전 부총리가 시 주석 집권 1기의 상무위원을 지냈던 만큼 중국 지도부 전체의 도덕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국의 시사 문제를 다루는 뉴스레터’시노시즘(Sinocism)’을 발행하는 중국 전문가 빌 비숍을 인용해 “(펑솨이가 폭로한) 사건 자체는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폭로된 가해 대상은 충격적”이라고 했다.
CNN방송은 “중국 당국은 연예인 대상 미투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번 사태 수습에 나섰다”면서 “중국 지도부가 파장 확산을 우려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웨이보에서는 ‘장가오리’와 ‘펑솨이’는 물론 ‘테니스’란 단어까지 금지어로 설정됐다. 중국 최대 영화, 드라마 평론사이트 더우반에서는 한국 드라마 ‘총리와 나’(2013~2014년 방영)가 인기 순위에 올랐다가 펑솨이 폭로글을 언급한 댓글들이 삭제되기도 했다. ‘총리와 나’는 장가오리 전 부총리 사건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각종 중국 드라마 사이트와 포털에서 검색 금지어에 올랐다.
펑솨이는 지난 2일 밤 10시 7분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 계정에 장 부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성폭행 고발 글을 게재했다. 그는 장 전 부총리가 톈진시 당서기(2007~2012년)일 때부터 내연 관계였다고 주장하며 2012년 말 장 전 부총리가 상무위원으로 승진하면서 왕래가 끊어졌지만 약 3년 전 베이징에서 장가오리 전 부총리 부부와 함께 테니스를 친 후 그의 집으로 갔다가 강제로 성관계를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장 전 부총리의 자택에서 성폭행을 당할 당시 그의 아내 캉제(康潔)가 망을 봤다고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