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서방의 장기 제재에 견딜 수 있는 자력갱생형 경제 모델을 이미 구축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를 ‘경제 요새화(economic fortification)’한 후, 우크라이나 공격 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바이든 정부가 “최고 수준의 제재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침공을 감행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미 뉴욕타임스(NYT)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 경제 요새화의 가장 큰 근거로 현재 6310억달러(약 757조원)에 달하는 막강한 외환 보유고를 들고 있다. 이는 중국·일본·스위스에 이어 세계 4위 규모다. 현 러시아 경제 규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상 최고치다. 외환 보유고 불리기는 푸틴이 미 재무부의 해외자산통제국에 대응하고자 전담팀을 꾸려 밀어붙인 것으로 ‘전쟁 실탄’ 확보의 성격이 강하다.
구소련 붕괴 후 45억달러까지 바닥났던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고는 2013년 5000억달러까지 늘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침공에 따른 제재 타격으로 3700억달러 아래로 급감했었다. 그러나 러시아 주요 수출품인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 상승에 힘입어 7년 만에 70% 이상 규모를 늘렸다. 에너지 수출 이익을 저장하는 창고인 러시아 국부 펀드(NWF)도 1860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유지 중이다.
이는 국내 성장을 제한하고 외부의 적에 대비하는 경제적 요새 확충에 집중한 결과다. 러시아는 그간 제재 속에서 국내 인프라 투자와 사회 지출을 극단적으로 조이는 보수적 재정 정책을 지속, 국민 실질소득이 급감했다. 2013년 이후 세계경제가 연평균 3%씩 성장할 때 러시아 성장률은 0.8%에 그쳤다. 현재 러시아 국민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1만달러로 세계 51위다. FT는 “현 러시아 요새화 전략은 전시(戰時) 안정을 위해 성장을 희생한 소련 시스템과 유사하다”고 했다.
러시아는 또 미국의 제재를 무력화하려 자국 통화 시스템을 집중적으로 탈(脫)달러화(de-dollarization)했다. 통상 러시아 같은 수출 의존 경제는 외환 보유고의 절반 정도를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로 채운다. 하지만 러시아는 크림반도 침공 전후로 달러 거래 규제를 받으면서 8년간 달러 비율을 47.1%에서 16.4%까지 줄여놨다. 대신 미국의 간섭을 덜 받는 유로화와 영국 파운드, 중국 위안화, 그리고 또 다른 안정 자산인 금(金) 비율을 늘렸다. 지난달 러시아 중앙은행 지급준비금 비율은 유로화 35%, 금 22%, 위안화 13% 순이다.
미국의 ‘국제 금융 결제 시스템(SWIFT)에서의 퇴출’ 위협도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1월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석유·가스 수출 대금 결제 통로인 SWIFT 퇴출에 대비해 자체 개발한 SPFS 시스템에 동유럽 국가들을 끌어들였다. 중국 국제 결제 시스템(CIPS), 러시아 국영 결제 카드(Mir), 이란·터키 등과 거래를 염두에 둔 러시아 국책 가상 화폐 ‘디지털 루블’ 등을 마련해놨다.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의존도 낮췄다. 지난해 미국이 러시아 국채 투자를 금지한 후 러시아 국채에 대한 외국인 지분이 20%까지 떨어졌다. 러시아 기업의 해외 금융기관 대출 규모도 2014년 1500억달러에서 현 800억달러로 축소시켰다.
NYT는 “전쟁 시 식량 등 생필품 부족에도 러시아 국민이 상당 기간 견딜 수 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러시아는 2014년 이후 제재로 유럽산 우유 수입 등이 막히자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가짜 치즈’를 개발했는데, “먹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푸틴은 주요 정치인과 국영기업 재벌(올리가르히) 등의 런던 아파트나 뉴욕 주식 투자 등이 막힌 데 따른 불만을 달래기 위해 국내 이권 사업을 몰아줬다. 이들이 유사시 자신을 배신하고 해외 도피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런 경제 요새를 뚫을 수 있는 변수론 국제 유가 폭락이 꼽힌다. 과거 러시아 경제는 에너지 가격 등락에 취약한 구조였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는 유가가 현 배럴당 90달러에서 반 토막 나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유럽연합(EU)의 러시아산 천연가스·원유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져 미국도 러시아 에너지 금수 제재는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NYT는 “러시아의 폭주를 막으려면 미국이 러시아의 상상을 뛰어넘는 제재를 짜내거나, 취약한 내부 경제·사회가 급격히 악화하는 변수밖에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