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각료를 질책하고 있다. /더가디언
지난 달 21일 열린 러시아 국가안보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은 나르쉬킨 해외정보국장이 자신의 의중에 반하는 말을 하자 강압적인 태도로 압박하며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고 있다. /유튜브

“최악의 경우 오늘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세르게이 나르쉬킨 러시아 해외정보국장)

“그게 무슨 뜻인가? 최악의 경우? 당신,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건가?”(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당황하며) 음... 저는...” (세르게이)

“(도네츠크·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건가? 말을 해봐, 말을! 분명하게 말해봐!” (푸틴)

‘21세기 차르(황제)’로 불리는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사흘 앞두고 크렘린궁에서 개최한 국가안보위원회에서 이 같은 대화가 오갔다. 푸틴 대통령은 나르쉬킨 해외정보국장이 자신의 의중에 반하는 말을 하자 강압적인 태도로 압박하며 원하는 답을 이끌어낸다. 나르쉬킨 국장은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의장 등을 역임한 푸틴의 측근이다.

이날 회의는 친러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있는 도네츠크·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 승인 안을 상정하고 논의했다.

회의 도중 연단에선 나르쉬킨 국장은 “니콜라이 플라토노비치(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서기)의 제안에 동의한다. 서방 국가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해 키예프(우크라이나)가 평화를 선택하고, 이를 이행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최악의 경우’ 오늘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푸틴 대통령이 분노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게 무슨 뜻인가. 최악의 경우? 당신은 우리가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냐”고 했다. 푸틴 대통령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르쉬킨 국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가 “음, 저는…”이라고 말하는 사이 푸틴 대통령이 다시 말한다. “(돈바스의 두 공화국) 주권을 인정하는 건가?”

세르게이 나르쉬킨 러시아 해외정보국장이 지난달 21일 열린 러시아 국가안보회의에서 발언 도중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듣고 있다. /유튜브 BBC

나르쉬킨 국장이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푸틴 대통령은 “말해보라. 말을 하라. 분명하게 말을 하라”고 윽박지른다. 나르쉬킨 국장은 “(도네츠크 및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자는 제안을 지지한다”고 답한다.

푸틴 대통령은 만족하지 못한 듯 “(해당 제안을) 지지하느냐. 분명하게 말해보라, 세르게이”라고 재차 질문을 던진다. 나르쉬킨 국장이 “제안을 지지한다”고 답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예, 아니오로 말하라”고 한다. 나르쉬킨 국장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자는 제안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푸틴 대통령의 압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하라”고 한다.

이에 나르쉬킨 국장은 “네, 저는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자는 제안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한다. 푸틴 대통령은 그제야 “좋다.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크렘린궁에서 국가안보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회의를 놓고 “푸틴 대통령이 주요 의사결정에서 측근들을 배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치를 연구하는 마리아 포포바 캐나다 맥길대 교수는 “푸틴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KGB에서 일했던 나르쉬킨 국장을 비롯해 보좌진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날 회의의 자리 배치만 봐도 이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푸틴은 회의 참석자들과 멀찍이 떨어져 혼자 앉았다. 러시아 국기 등을 배경으로 앉은 푸틴과 거리를 둔 참모들이 부채꼴로 둘러앉아있는 모습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우려한 배치인 것으로 보이지만, 포포바 교수는 “자신은 왕이고 보좌관들은 단지 신하일 뿐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