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의 외교 정책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최대 변곡점을 맞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3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나 이슬람국가(IS) 등 글로벌 비(非)국가 테러단체를 상대로 한 외교·안보 정책에 치중했던 미국이 중국과의 갈등에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겪으면서 다시 ‘적대 국가’와의 정면 대결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자국 안보와 직결된 지역이 아닌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에 앞장서며 국제사회의 반(反)러 공조를 이끌어 내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로 흔들렸던 ‘자유 세계 선도국’이라는 지위도 확고히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유럽판 9·11테러’로 부를 정도의 중대 사안으로 보고, 외교안보정책의 전면 수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던 중동에서 아시아로 대외 정책의 축을 옮겼다. 장기적 대외 정책의 우선 순위를 중국으로 설정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호주, 인도, 일본과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협의체인 쿼드를 강화했다. 영국·호주와는 군사·안보 파트너십인 오커스(AUKUS)를 조직, 호주에 핵잠수함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대외 정책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NYT는 “동맹을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바이든의 임무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급격히 확장됐다”며 “향후 미국은 모든 대외 정책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게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라고 했다.
러시아가 중국에 맞먹는 새로운 ‘주적(主敵)’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거론되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11일 연설에서 “자유 세계가 (푸틴에 맞서) 결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NYT는 “이 같은 표현은 과거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자유 세계 전체가’ 테러리즘과의 전쟁에 나섰다고 한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다른 점은 부시가 테러 집단을 상대로 한 전쟁을 선포했다면, 바이든은 러시아를 새로운 주적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바이든은 러시아에 맞서 유럽과 아시아에 있는 동맹국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러 경제 제재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인도적 지원에 앞장서며 동맹국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석유 가격 인상 우려로 중산층 민심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지난 8일 러시아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시행했다. 우크라이나군에 스팅어 대공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무기와 12억 달러를 지원했다. 미 의회는 올해 국방 예산안에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136억 달러(약 17조원)를 책정했다.
미국의 노력은 유럽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각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한때 무용론이 제기되던 나토는 미국과 유럽의 군사 협력 핵심으로 다시 부상했으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고 나섰다.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더욱 결속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4일 “(아시아 등 전 세계가)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며 “아시아의 미국 동맹들이 중국, 북한 등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는 안보 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에서는 미국의 전술핵을 공유해야 한다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주장이 자민당 지도부 내에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호주에서는 대중 억지력을 강화하기 위한 국방 예산 증액과 쿼드를 통한 결속 강화가 이뤄지고 있다. FT는 “한국에서도 한미동맹 강화와 대북 억지력 강화를 위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는 보수 후보(윤석열)가 당선됐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달라진 미국 외교의 또 다른 면모는 전선을 가리지 않는 실리 외교다. 미국은 그동안 자유 진영과 계속 엇박자를 냈던 일부 권위주의 정권들과의 관계도 재검토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베네수엘라 등 관계가 껄끄럽던 권위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도 러시아의 원유 수출길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NYT는 “동맹과 적국을 둘러싼 미국의 전략적 셈법이 복잡해질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