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를 점령했던 러시아군이 병력 대부분을 돌연 벨라루스 접경 지역으로 철수시켰다. 장병 일부가 방사선 피폭 증상을 보여 어쩔 수 없이 퇴각했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다.

우크라이나 국영 원전 운영 기업인 에네르고아톰은 지난 31일(현지 시각) 성명을 내고 “러시아군이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통제권을 우리 직원에게 넘겨주고 현장을 떠났다”고 밝혔다. 러시아군은 원전 인근에 있는 슬라우티크 마을 등에서도 모두 철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이날 “체르노빌 원전을 점거했던 러시아군이 벨라루스 접경 쪽으로 이동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미 국방부 관계자는 “러시아군이 체르노빌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러시아는 이틀 후인 26일 체르노빌 원전을 장악했다. 당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러시아는 핵시설 안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등 러시아의 원전 점거에 전 세계적인 우려가 쏟아졌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원전이 손상될 경우 방사능 물질이 광범위하게 퍼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9일 교전으로 인한 송전 시설 파손으로 전력이 차단되면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될 위기에 처했지만 가까스로 전력을 복구해 고비를 넘겼다.

우려했던 유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러시아군이 피폭됐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우크라이나 현지 유니안 통신은 이날 체르노빌 접근 제한 구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군이 원전 인근에 있는 ‘붉은 숲’에서 참호를 팠다”며 “피폭된 러시아 병사를 태운 버스 7대가 벨라루스 병원으로 향했다”고 전했다. 붉은 숲은 체르노빌 원전이 있던 도시인 프리비야트 인근 10km 이내 숲을 가리킨다. 원전 사고 이후 방사선에 피폭된 소나무들이 붉은 색깔로 변해 집단 고사했다. 이곳 지표의 시간당 방사선량은 최대 10밀리시버트로 일반인의 연간 방사선 피폭 한도(1밀리시버트)의 10배에 달한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28일 “체르노빌 원전을 장악한 러시아군이 보호 장비를 하지 않은 채 장갑차를 몰고 방사능 흙먼지를 일으키며 붉은 숲을 통과했다.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원전은 지난 1986년 4월 26일 원자로 가동 시험 중 핵분열을 통제하지 못해 역사상 최악의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곳이다. 현재 모든 원자로의 가동은 중단된 상태로 사용 후 핵연료는 냉각 시설에 보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