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북서쪽 부차와 이르핀 등에서 벌어진 민간인 집단 학살에 대한 책임을 전면 부인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해외 언론과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속속 공개되는 민간인 학살 증거 사진과 영상이 모두 러시아를 전쟁 범죄자로 몰아가려는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고 했다.

드미트리 폴리얀스키 주(駐)유엔 러시아 부대사는 지난 3일(현지 시각) “부차에서 벌어진 우크라이나 급진 민족주의자들의 극악무도한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 4일 안보리 회의를 긴급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도 “부차 등에서 나온 사진과 영상은 모두 우크라이나 정부가 서방 언론을 위해 연출한 것”이라며 “우리 군 주둔 당시 폭력적 행위로 피해를 본 주민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적반하장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강력 반발했다. 이날 러시아의 안보리 소집 요구는 4월 순회 의장국인 영국에 의해 거부됐다. 러시아가 자국 입장을 강변하기 위해 안보리를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해석됐다. 러시아 측은 그러나 “국제적 수준의 논의가 필요하다”며 “소집을 재요구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우크라이나 측도 5일 안보리 회의를 요청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먼저 안보리 소집을 요청한 배경을 놓고 자국의 혐의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며 “진짜 집단 학살 자행자는 우크라이나”라는 식의 이른바 ‘물타기’ 포석이란 관측도 나왔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가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계 주민을 상대로 집단 학살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번 전쟁을 시작했다.

안보리가 열릴 경우,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상임이사국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제노사이드(인종 학살) 자행 여부와 규탄 결의안 채택이 논의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난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철군 결의안처럼 러시아와 중국 두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행사해 결의안 채택이 무산되고, 제노사이드 여부도 가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다만 유엔총회에서는 다수결로 ‘구속력 없는 결의안’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 북부 전선에서 병력을 줄이고, 전력을 동부 돈바스 지역과 남부에 집중하고 있다. CNN은 미국 정부 고위 인사를 인용해 “푸틴 대통령이 2차 대전 승전 기념일인 다음 달 9일에 우크라이나 전쟁 승리를 선언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