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유엔(UN)본부의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선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희생당한 민간인 시신을 찍은 90초 분량의 동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동영상 이후 화면에 등장해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은 끔찍한 전쟁범죄”라며 “대량 학살이 자행된 부차에 안보리가 보장해야 할 안보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당장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수십명의 각국 외교관은 숙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유엔 안보리는 러시아를 막을 아무런 조치를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장쥔 주(駐)유엔 중국 대사는 러시아 편을 들며 “책임 추궁은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결론이 나오기 전에는 각 측은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 실상이 알려지면서 전 세계가 분노로 들끓고 있지만 유엔은 무능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민간인 수백명이 잔인하게 살해당했는데도 세계 평화와 인류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이 국제기구는 동시통역 이어폰만 낀 채 책상에 앉아 대화하는 회의장 역할밖에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 헌장 1장 1조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 평화를 유지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침략과 파괴 행위를 진압하기 위해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취한다”는 이 조항은 거대한 폭력 앞에 ‘작동 불능’의 처참한 현실만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지난 2월 24일 이후 트위터에선 유엔에 대한 조롱과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2차 대전 승전국의 설계로 77년 전 창설된 유엔이 수명과 역할에 한계가 온 것 아니냐는 쓴소리가 표출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지도 못하는 유엔이 무슨 소용이 있나.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유엔은 푸틴에게 겁을 먹고 도망치고 있다” “유엔은 아프리카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구인가. 전쟁을 막는 데 항상 실패하는 유엔”과 같은 게시글이 하루에도 수백건씩 올라온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유엔 안보리는 다시 한번 쓸모없는 기구라는 사실이 입증됐다”며 “전 세계 나라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하나의 글로벌 기구에 맡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유엔이 무기력을 드러낸 건 우크라이나 사태뿐만 아니다. 작년 2월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해 지금까지 17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살해됐지만 평화유지군 파견은커녕 규탄 결의안 하나 내지 못했다. 올해 11년째를 맞은 시리아 내전으로 50만명이 숨지고, 5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지만, 유엔은 러시아의 시리아 정부군 비호와 미국의 무관심 속에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해 ‘식물 유엔’이란 소리까지 들었다. 올 들어 북한이 잇따라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안보리 결의를 위반했을 때도 안보리는 중·러의 반대로 규탄 결의안은 고사하고 언론 성명조차 내지 못했다.
독재자나 불량 국가가 평화를 파괴하고 반인륜 범죄를 저질러도 유엔이 제대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러시아와 중국의 존재 때문이다. 유엔이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결정을 내리려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5개 상임이사국(P5)의 만장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중국과 러시아가 “특정국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며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AFP통신은 “본질적으로 유엔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고 있는 격” “유엔은 자연재해나 전쟁이 났을 때 인도주의 지원을 하는 기구로 격하됐다”고 보도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유엔 안보리가 국제 반인륜 범죄를 ‘방조’하거나 더 나아가 조장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 2월 안보리가 전쟁을 막기 위해 심야 긴급회의를 하는 도중에도 러시아는 보란 듯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범했다. 젤렌스키는 “우리는 안보리 거부권을 ‘죽음의 권리(right to die)’로 바꿔 사용하는 나라를 상대하고 있다”며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러시아 퇴출을 요청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그동안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교체하거나 만장일치 제도를 바꾸거나 상임이사국 수를 늘리자는 개혁 요구가 많았지만 현실적으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정국을 상임이사국에서 퇴출시키는 절차 자체가 유엔 헌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1차 세계대전으로 국제연맹이, 2차 대전으로 유엔이 탄생한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국제 질서가 탄생해 유엔을 대체할 국제기구가 나오지 않는 한 현 체제를 개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