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아조우스탈 제철소 모습. 이곳 지하 벙커에 우크라이나군 2000명과 민간인 1000명이 집결해 있다./TASS 연합뉴스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 16일(현지 시각) “아조우스탈(Azovstal) 제철소를 제외한 마리우폴 전 지역을 장악했다”며 “아조우스탈에 있는 군인들이 목숨을 구할 유일한 기회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는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파리 한 마리도 통과하지 못하도록 제철소를 봉쇄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러시아의 포고 이후 일주일이 흘렀지만, 우크라이나군은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결사 항전’ 보루로 삼아 버티고 있다. 아조우스탈에는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육로로 연결하는 요충지 마리우폴을 방어하는 제36해병여단과 아조우연대 병력 2000명과 민간인 1000명이 집결해 있다. 세르히 볼리나 제36해병여단 지휘관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최후의 시간이 임박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결코 러시아에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리우폴 항전의 거점이 된 아조우스탈 제철소가 최근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구소련이 건설한 제철소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에 맞선 우크라이나 ‘최후의 요새’로 변모한 것이다.

유럽 최대 규모(11㎢)로 연간 400만t의 철강을 생산해 온 아조우스탈의 역사는 1933년 시작됐다. 소련이 돈바스 지역의 풍부한 철광석으로 만든 철강을 쉽게 선적할 수 있도록 아조우해(海) 인근에 부지를 만들어 제철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941년 독일 나치군이 마리우폴을 점령하면서 탄약 제조 공장으로 용도가 잠시 바뀌었지만, 1943년 소련이 다시 이를 탈환해 재건했다.

냉전 시대 소련은 핵 공격 등에 견딜 수 있도록 제철소 지하 곳곳에 터널과 벙커를 건설했다. 미로처럼 펼쳐진 6층 구조의 터널은 깊이가 최대 30m, 길이는 20㎞가 넘는다. 무선통신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외부 침입을 막는 데 용이하다. 지상에 길게 이어져 있는 용광로와 발전소, 굴뚝 등 제철 설비는 방어막 역할을 한다. 각 건물은 수m 두께의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친러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얀 가긴 고문은 “도시 아래에 또 다른 도시가 있는 형태”라며 “아조우스탈은 폭격과 봉쇄에 견딜 수 있게 요새처럼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소련이 적의 공격을 막으려고 건설한 냉전 시대의 산물이 우크라이나의 든든한 안전장치가 됐다”고 전했다. 다만 러시아가 금지된 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엔 아조우스탈 지하의 우크라이나군과 민간인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아조우스탈 지하 방공호에는 현재 여성과 어린이 등 민간인 1000여 명이 대피해 있다. 아조우연대가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한 동영상에는 물과 음식이 부족하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지난 21일 아조우스탈 피신처에서 촬영한 이 영상에서 한 여성은 “곧 아이들에게 줄 음식이 떨어질 것”이라며 “포격이 없는 날이 단 하루도 없어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무섭다”고 말했다. 한 소녀는 “2월 27일에 할머니, 엄마와 함께 집을 떠났는데 그날 이후 하늘을 보지 못했다”며 “우리는 여기에서 안전하게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23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방공호에 은신해 있는 우크라이나 어린이들.대부분이 제철소 직원 가족이다./로이터 뉴스1

아조우스탈은 우크라이나 철강·광산 기업인 메틴베스트가 운영하고 있다. 최대 주주는 우크라이나 최대 부호인 리나트 아흐메토우 SCM 회장이다. 러시아 침공 이후 10조원의 자산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아흐메토우 회장은 “전쟁이 끝나면 마리우폴로 돌아가 우크라이나 철강 산업을 재건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렉시 아레스토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은 24일 러시아 측에 아조우스탈 제철소 인근에서 특별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25일 오후 2시부터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민간인 철수를 허용하기 위해 교전을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