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한국, 대만이 이끌어온 글로벌 반도체 투자 경쟁에 유럽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1세기 산업의 ‘쌀’이 된 반도체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산업 전체가 멈출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물론,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최소한의 ‘반도체 자립(自立)’ 기반 만들기에 나섰다.

프랑스 대통령실(엘리제궁)은 11일(현지 시각) “프랑스와 이탈리아 합작 기업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미국 반도체 위탁 생산 전문기업 ‘글로벌파운드리스’와 손잡고 프랑스 서남부 그르노블 일대에 대규모 반도체 제조 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총 57억유로(약 7조5500억원)를 투자해 선폭 18㎚(나노미터)의 공정을 적용한 생산 라인을 여러 개 만들 예정이다. 18㎚ 공정은 미국 인텔과 대만 TSMC, 삼성전자 등은 이미 7~8년 전에 실용화한 기술로, 최신 모바일 반도체와 고성능 CPU(중앙처리장치), 초고속 메모리 제품을 만들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주로 생산하는 자동차·가전제품·산업 장비용 반도체 제작에는 충분한 기술이다.

이 반도체 공장은 최근 부지 선정을 마치고, 연내 건설을 시작해 오는 2026년 먼저 완공된 생산 라인부터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원자력 분야를 제외하면, 프랑스의 산업 투자로는 최근 수십년래 최대 규모”라며 “프랑스와 유럽의 산업 주권을 지키기 위한 큰 전진”이라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12일 공장 예정 부지를 직접 방문해 둘러보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유럽 내 반도체 투자는 독일이 한발 앞서 있다. 독일은 지난 3월 프랑스와 치열한 경쟁 끝에 미국 인텔의 최신 반도체 공장을 북동부 마그데부르크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인텔은 이곳에 170억유로(약 22조5000억원)를 투자해 CPU부터 메모리까지 다양한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최대 8개의 생산라인을 만든다. 내년 상반기에 공장 건설을 시작, 오는 2027년부터 본격 가동하는 것이 목표다. 독일과 EU는 이 공장에 약 70억유로(9조2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은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와도 독일 내 반도체 공장 건립을 논의 중이다. 독일이 반도체 산업에 투자키로 한 자금은 총 140억유로에 달한다.

유럽은 2000년대 이후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를 사실상 중단했다. 설계 기술에서는 미국에, 제조 기술에는 대만과 한국에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따라잡기 힘든 수준이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유독 약품에 의한 환경 오염과 근로자 건강 문제가 제기되면서 사회적 반발도 컸다. 유럽 최대 전자기업이었던 필립스는 지난 2006년 반도체 사업부를 해외 사모펀드에 83억 유로에 매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커지면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 필요성이 대두됐다. EU는 현재 세계 시장의 10% 내외인 유럽산 반도체 점유율을 오는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EU 회원국 반도체 산업에 총 430억유로(약 56조5000억원)를 투자하는 ‘유럽 반도체법’을 제안해 현재 EU 의회와 회원국이 검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