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스리랑카에 이어 방글라데시, 라오스,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국가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공급망이 무너지고, 고유가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미국 등 선진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 등으로 글로벌 경기가 빠르게 침체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대홍수 등이 겹치면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자금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자금이 지원돼도 일시적 효과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영국 경제 분석 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은 앞으로 4년 안에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파키스탄, 라오스, 미얀마 등을 꼽았다.
중국·베트남에 이어 세계 3위 의류 수출국으로 급성장, 아시아 지역에서 또 하나의 ‘성공 신화’를 쓰고 있던 방글라데시는 최근 IMF에 45억달러(약 6조원) 규모의 차관을 요청했다. 방글라데시는 의류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며 코로나 유행 전인 2019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7.9%, 2018년 7.3%를 기록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빈곤율은 1991년 58.8%에서 2016년 24.3%로 절반으로 줄었고, 2026년까지 유엔 개발정책위원회가 지정한 최빈국 지위에서 졸업해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에너지·식품 가격 상승이 급등하면서 경제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달러 대비 방글라데시 타카화 가치는 지난 3개월 동안 20% 하락했으며, 지난해 7월부터 올해 5월까지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172억달러(약 23조1000억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유가 등이 시작된 이후에는 전력난으로 전국 곳곳에서 순환 단전이 계속됐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지난달 24일 학교 수업일수와 관공서 근무시간을 단축했다.
라오스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국제기관들이 스리랑카에 이어 디폴트를 선언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는 라오스는 지난 6월 물가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23.6%를 기록한 데 이어 7월에는 25.6%까지 치솟았다. 연료 및 소비재 가격 상승과 라오스 통화 평가절하가 인플레이션을 이끌고 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라오스의 공공 부채는 145억달러로 GDP의 88%에 달한다. 이 중 절반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등으로 인해 중국에 진 빚이다. 국제 신용 평가사 피치는 “화폐 평가절하로 라오스의 GDP 대비 공공 부채 비율이 2020년 73%에서 2022년 108%로 급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키스탄에는 사상 최악의 홍수가 덮쳤다. 지난 6월부터 3개월간 폭우가 쏟아지면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고, 1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아흐산 익발 파키스탄 개발계획부 장관은 “홍수 피해액이 100억달러(약 13조4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유엔은 지난달 30일 인도적 지원과 피해 복구를 위해 파키스탄에 1억6000만달러(약 2142억원)를 긴급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IMF도 파키스탄의 디폴트를 막기 위해 11억달러(약 1조4729억원) 상당의 구제 금융 패키지를 승인했다.
지난 4월 디폴트를 선언한 스리랑카는 IMF와 구제금융 협상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31일 라닐 위크레마싱헤 스리랑카 대통령은 “IMF와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스리랑카의 총 대외 부채 규모는 510억달러(약 68조원)에 달하며, IMF에 20억~3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신청한 상태다.
스리랑카 정부는 IMF와의 협상 타결을 위해 이번 달부터 부가가치세를 12%에서 15%로 인상하기로 했으며, 전기 요금을 최대 264% 인상하고 국영기업 민영화 등 구조 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지난달 24일부터는 한 푼이라도 외화를 아끼려 샴푸·화장품·전자제품 등 비필수 소비재 300여 개에 대해 한시적으로 수입 중단 조치를 내렸다.
국제기구는 1997년 태국에서 시작돼 인도네시아·필리핀·한국으로 확산한 아시아 금융 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도 내놓고 있다. 파키스탄 비영리 금융 컨설팅 단체 ‘카란다즈 파키스탄’의 아마르 하비브 칸 위험관리책임자는 블룸버그통신에 “남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10년 동안 저비용으로 달러를 끌어다 쓰며 성대한 파티를 즐겼다”면서 “1997년의 동남아시아 위기 때와 분위기가 흡사하다”고 진단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신흥국들의 외환 보유액이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인 2008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면서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경제권에서 디폴트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