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에서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여성 차별과 억압에 반발하는 시위가 6개월 넘게 계속되는 가운데, 10대 여학생들을 겨냥한 독극물 테러가 이란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 3개월간 전국 50여 여학교에서 최소 1000여 명이 호흡 곤란과 신체 마비 등 피해를 입었지만, 이란 정부는 테러의 배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정부가 여성들이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에 불만을 품고 공모해 벌인 보복성 공격”이라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이란 정부는 5일(현지 시각) 최근 이란 전역에서 독극물 테러 범죄 피해를 입은 여학교가 52곳으로 늘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말 테헤란 남부 쿰의 한 고교에서 불쾌한 냄새를 맡은 학생 수십 명이 호흡 곤란과 메스꺼움, 현기증 등 증상을 보이며 쓰러진 뒤, 3개월 넘게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AP통신과 이란 ISNA통신 등은 “서부 아브하르와 잔잔, 남부 아흐바즈와 시라즈, 북동부 마슈하드, 중부 이스파한 등 이란 30주 중 21곳에서 유사 사례가 보고됐다”며 “피해자가 1200여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테러에 사용된 물질은 ‘유기인산염’인 것으로 추정된다. 농약과 살충제에 들어가는 독성 화합물로, 피해 학생들은 학교 내에 무차별 살포된 독성 물질을 흡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AFP 통신은 “대부분은 치료를 받고 곧 회복했으나 일부는 수개월째 중독 증상을 겪고 있다”며 “극심한 가슴 통증과 사지 마비까지 보였다”고 했다. 피해 학생들의 부모는 학교와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질타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란 국영 TV는 “어머니들이 학교로 몰려와 경비원을 배치하고 교내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가동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 정부는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외신 보도가 이어지면서 전 세계에서 이란의 열악한 여성 인권 현실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유네스 파나히 이란 보건부 차관은 지난달 27일 “여학교를 폐쇄해 소녀들의 교육을 중단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며 “관련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주일이 다 되도록 정부는 테러 배후에 대해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이란 내에 공포와 절망감을 조성하기 위한 적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관영 언론도 “해외의 반(反)이란 세력이 연관됐다”고 보도했다. 사건 배후를 미국과 이스라엘, 서방으로 떠넘기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반정부 ‘히잡 시위’에 대한 보복 성격이라는 의혹은 점점 확산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마흐사 아미니(당시 22세)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다가 의문사한 뒤 이란에서는 6개월 넘게 ‘여성, 삶, 자유’ 구호를 내세운 반정부 시위가 이어져 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테러의 배후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이 있다”며 “이들이 시위의 선두에 섰던 여학생들에게 복수하려 한다”고 전했다.
여학생들은 등교 거부로 독극물 테러에 맞서고 있다. 사건이 처음 발생한 쿰 등지에선 여학교 출석률이 20%대로 떨어졌다. 온라인 반정부 매체인 이란 와이어는 지난 4일 “혁명수비대가 테헤란 일부 지역의 여학교에서 강간과 수간(獸姦) 행위 등이 나오는 포르노 영상물을 시청하도록 한 후, ‘반체제 시위는 이와 같은 성적 타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이란에서는 이번 반정부 히잡 시위로 약 2만명이 체포되고, 53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란 국민은 물론, 해외 국적의 외국인들까지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고 사형 판결까지 받았다. 미국의 이란 인권 운동가 마시 알리네자드는 “독극물 테러는 시위에 나선 용감한 여성들에게 대한 이슬람 국가의 복수”라며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나서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정권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