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찰스 3세 국왕이 22일(현지시각) 첼시 플라워쇼를 찾아 황지해 작가와 포옹하고 있다./황지해 작가

한국의 정원을 세계 무대에 소개해 호평받은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47) 작가가 ‘2023 첼시 플라워 쇼’에서 금상을 받았다. 황 작가의 작품은 영국 찰스 3세 국왕이 정원을 둘러보고 찬사를 보낼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영국 찰스 3세 국왕이 22일(현지시각) 첼시 플라워쇼를 찾아 황지해 작가의 작품을 돌아본 후 황작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안아주고 있다./@OLIVER DIXON

‘첼시 플라워 쇼’ 측은 23일(현지 시각) “한국의 정원 디자이너 황 작가가 지리산에서 영감을 얻은 정원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A Letter from a Million Years Past)’를 출품해 주요 경쟁 부문인 ‘쇼 가든’ 금상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첼시 플라워 쇼는 1827년 처음 개최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195년 넘게 이어져 온 정원 박람회다. 250년 역사를 가진 영국왕립원예협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거의 매년 이곳을 찾았다. 올해에는 찰스 3세 국왕과 커밀라 왕비가 개막식이 열렸던 지난 22일 방문했다.

황 작가 측에 따르면, 찰스 3세는 쇼 가든 출전작 12개 중 3개만 방문했는데, 황 작가 작품을 가장 먼저 찾았다. 꼼꼼히 설명을 들은 찰스 3세가 예정과 달리 정원 안에 들어가 보겠다고 해서 경호원들을 당황하게 한 것으로 전해졌다. 찰스 3세는 정원을 둘러보고는 ‘정말 맘에 든다’ ‘훌륭하다’ 등 찬사를 쏟아냈다고 한다.

황지해 작가의 ‘백만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 정원에서 국악 연주 공연이 펼쳐졌다. /EPA 연합뉴스

황 작가가 마지막에 “안아봐도 되냐”고 물어보자 찰스 3세는 “물론”이라고 답하고는 웃으며 포옹해 줬다. 영국에서 국왕 등 왕실 인사들이 일반 대중과 악수 이상 접촉을 하는 일은 흔치 않다. 현장에 있던 BBC 취재진은 황 작가에게 “국왕이 정원 안으로 들어가다니 특별한 날”이라며 “포옹을 한 상황도 사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이 밖에 유명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도 황 작가의 작품을 1시간가량 둘러봤다.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는 지리산 동남쪽 약초 군락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총 200t 무게의 바위들을 배치해 지리산 숲속 지형을 재현했다. 바위 사이엔 지리산 젖줄을 표현한 작은 개울이 흘러 습도를 조절하도록 했다. 사이사이에는 지리산에만 있는 지리바꽃과 멸종 위기종인 나도승마, 산삼, 더덕 등 식물 300여 종이 자리했다. 약초꾼들의 건조장도 세워졌다.

황지해 작가의 '백만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 조감도. /황 작가 인스타그램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황 작가를 집중 조명했다. 이곳의 바위는 채석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스코틀랜드 산에서 채집한 것이다. 황 작가를 위해 운반된 바위들은 약 100년간 첼시 플라워 쇼 역사 중 가장 큰 돌이라고 한다. 식물 절반 이상은 웨일스의 농장에서 가져왔다. 농장주 부부는 30년 전부터 제주도와 울릉도부터 DMZ까지 전국을 누비며 한국 식물을 가져와 키웠다. 황 작가는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 콘크리트 등을 쓰지 않고, 작품 속 식물은 노팅엄 매기 암 센터로 옮기거나 일부 판매·기부하는 방식으로 재사용한다.

'2023 첼시 플라워쇼' 개막 전 황지해 작가가 공개한 자신의 손. /황 작가 인스타그램

이번 정원 작품을 만들기까지 황 작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그는 첼시 플라워 쇼 출전작에 선정된 후 한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를 누비며 바위와 식물을 옮기는 현장을 찾았다. 이후 자신의 부지에 정원을 만들 때도 생각한 바를 이루기 위해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소셜미디어에 공개한 흙으로 더러워진 손에는 붕대와 반창고가 감싸져 있다. 찰스 3세와 포옹할 때도 황 작가의 손에는 여전히 반창고가 둘러져 있었다.

건강 문제로 오랜 공백 끝에 첼시 플라워 쇼에 복귀한 황 작가는 “2015년 인생을 바꿀 진단을 받은 후 궁극적으로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며 약초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정원에 있는 큰 바위들은 20억년이 넘는 시간을 상징한다.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 바위들은 수백만 년 동안 그 안에 어떤 형태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바위 틈새에 작은 식물과 꽃이 피어나면서 이 사랑을 표현해 왔다”며 “따라서 바위와 식물은 수백만 년 전에 우리에게 보낸 특별한 편지처럼 보일 것”이라고 했다.

황지해 작가의 ‘백만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에서 한국식 탕약을 달이는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AP 연합뉴스

황 작가는 정원을 통해 한국만의 고유한 정서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정원 디자이너이자 환경예술가다. 그는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건축업을 하던 두 남동생을 돕다가 자연스럽게 조경 작업을 하게 됐다. 미술가로서의 조형 감각과 현장 경험이 결합해 자신만의 정원 디자인 세계를 만들었다. 황 작가는 2011년 첼시 플라워 쇼에 전통 화장실을 정원으로 승화한 ‘해우소’를 처음 출품해 아티즈 가든 부문에서 금상과 최고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DMZ: 금지된 정원’으로 쇼 가든 부문 전체 최고상(회장상)과 금상을 동시에 받았다.

이번 작품 출시를 위해 호반문화재단이 황 작가를 돕고 있다. 2012년 첼시 플라워 쇼에서도 호반문화재단은 황 작가의 ‘DMZ 정원’을 후원했었다. 올해 첼시 플라워 쇼는 22일 VIP와 프레스 대상으로 사전 개막했으며 정식 운영은 23일부터 27일까지다. 최고상과 인기상은 추후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