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타라사 셰브첸코 거리. 지난 14일(현지 시각) 오후 1시경 짧은 섬광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하늘을 찢을 듯한 폭음이 ‘쾅’ 하고 울렸다. 평범한 시민으로 보였던 이들은 폭음이 나자 노련한 병사처럼 순식간에 바닥으로 몸을 낮췄다. 몇몇은 황급히 근처 건물로 뛰어들기도 했다.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도 일제히 급제동을 하며 멈춰섰다. 1분쯤 지났을까. 더는 폭발음이 이어지지 않자 납작 엎드렸던 시민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멈춘 도시는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복을 입은 한 중년 남성이 주먹을 휘두르며 “빌어먹을 러시아 놈들!”이라고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16일 새벽엔 천둥 같은 20여 회의 폭발음이 키이우 전체를 흔들었다. 호텔 창문이 금방이라도 깨져나갈 듯 거세게 흔들렸다. 창밖엔 밝게 빛나며 하늘을 가르는 러시아 미사일들의 궤적이 보였다. 키이우 시내를 겨냥해 날아든 미사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솟아오른 우크라이나의 방공 미사일과 굉음을 내며 부딪쳤고, 파편이 불꽃놀이처럼 하늘로 퍼져나가며 빛을 뿜었다. 20일 밤엔 이란산 샤헤드 드론 18대가 키이우 상공에서 폭발해 떨어졌다. 200만명이 넘는 키이우 시민들은 집 안에서 숨죽인 채, 살상을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금속 덩이리들이 자신이 사는 도시의 하늘을 잠식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러시아의 침공 후 1년 3개월이 흘렀지만 키이우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과 폭격의 공포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키이우에 발령된 공습경보는 총 750회에 이른다. 하루 평균 1.93회다. 키이우와 그 주변에서 공습으로 희생된 이들의 수는 1000여 명에 육박했다.
매일같이 공습이 이어지는 중에도 키이우 시내 곳곳에선 재건의 의지가 엿보였다. 지난겨울 우크라이나를 강타했던 에너지난이 풀리면서, 암흑천지였던 키이우 밤거리엔 다시 신호등과 가로등이 켜졌다. 거리의 식당과 상점가도 제한적 야간 영업을 시작했다. 키이우 국립대 근처의 셰브첸코 공원에서 만난 필로넨코(30)씨는 “폭격이 휩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우리 모두 출근을 하고 학교에 간다”고 했다. “푸틴은 우리가 미사일과 드론이 두려워 도망가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우린 절대 겁먹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겁니다. 우리에게 재건과 일상 회복은 또 하나의 투쟁입니다.”
러시아의 수도 키이우 공습은 최근 들어 점점 잦아지고 있다. 키이우에 머무는 동안 10일 연속 야간 공습이 이어지기도 했다. 고요하고 검은 밤의 하늘을 빛과 굉음으로 찢으며 닥치는 공습은 키이우를 무거운 공포로 짓누른다.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를, 귀를 막아도 피할 수 없는 폭발음이다. 러시아가 발사하는 미사일을 패트리엇(미국의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 등 방어 시스템이 격추하면서, 음속으로 충돌한 금속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굉음이 30여 분간 이어진다. 공습경보는 하룻밤에 두세 번씩 울리기도 한다.
최근엔 공습경보가 뒤늦게 나오는 일도 잦아졌다. 방공호 대피를 돕던 호텔 직원은 “러시아의 극초음속 미사일 ‘킨잘’ 때문”이라고 했다. 킨잘은 기존 미사일보다 두세 배 빠른 마하 5~10(소리의 5~10배)으로 날아오기 때문에 공습경보를 미리 울릴 틈조차 없다는 것이다. 군용 보호 장구 판매점을 운영하는 올렉시(50)씨는 “미사일이 바로 머리 위를 지나는 듯한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나는 가장 무섭다”며 “가끔 비슷한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고 했다. 대학생 드미트료(25)씨는 “폭격엔 이제 인이 박였다고 생각했는데 저 소리엔 익숙해지지가 않는다”라며 “러시아가 핵무기를 쓸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는데 제발 그런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서방의 방공 미사일 덕분에 키이우에선 지난달 29일 이후 민간인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수도방위여단 관계자는 “3~4중의 미사일 방어망이 키이우를 보호하고 있다”고 했다. 슬로바키아가 제공한 구(舊) 소련제 S-300 미사일, 독일산 IRIS-T, 미국과 노르웨이가 공동 개발한 나삼스(NASAMS) 등이 시 외곽부터 대통령궁 등 핵심 시설이 있는 시 중심까지 겹겹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근엔 미국산 패트리엇 미사일 방어 시스템 2포대가 추가됐다. 16일 러시아의 킨잘 공습으로 이 중 한 포대가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이들 미사일 포대의 위치는 극비다.
연일 이어지는 공습은 그러나 다른 형태로 키이우 시민들의 몸과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극심한 폭격 다음 날은 여지없이 거리가 한산해진다. 잠을 설친 시민들의 표정은 불안이 점령한 듯 하나같이 퀭했고, 눈빛은 지쳐 있었다. 키이우의 한 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안나(25)씨는 “공습 때문에 일주일에 4~5일은 제대로 잠을 못 잔다”며 “최근엔 아예 깊은 지하철 플랫폼에 가서 침낭 속에서 자는 일도 잦아졌다”고 했다.
술 판매도 급증했다. 수퍼마켓 매대의 상당 부분이 맥주·보드카 등 술로 채워져 있다. 대낮부터 취한 이들이 늘어나자 키이우는 오전 11시 전엔 일절 주류 판매를 금지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예브메노바(40) 박사는 “폭격에 대한 공포, 전선에 있는 자녀 걱정, 악화한 생활난 등으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며 “신경 안정제나 수면제 등을 처방해 주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키이우 시내엔 24시간 AK-47 소총과 수류탄 등으로 중무장한 군인과 무장 경찰이 순찰을 돈다. 러시아 특수부대의 강습(強襲) 가능성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궁 주변 1㎞ 내의 모든 도로는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차단됐다. 기자들의 접근도 엄격히 제한됐다. 검문소의 우크라이나군 장교는 “(취재 등) 용무가 있다는 허가서가 없으면 이 안으로 못 들어간다”고 했다. 주요 관공서도 주변 300m가 특별 경계 지역으로 지정되어 사진 촬영이 완전히 금지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