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용병그룹 바그너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로스토프나도누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TV에 나와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TASS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측근이었던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수장의 반란이 마무리된 다음 날인 25일(현지 시각) 국영 로시야TV에 나와 “‘특별 군사작전’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 이는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이라고 했다. ‘특별 군사작전’이란 자신이 주도한 우크라이나 침공을 말한다. 반란 기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행보를 이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2000년 이후 23년 동안 철통처럼 유지돼 온 푸틴 체제가 종말을 맞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2000년 5월 집권한 푸틴은, 연임 제한 규정에 걸려 ‘실세 총리’로 막후 실력을 행사한 2008~2012년을 포함해 지금까지 러시아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해 왔다. 개헌을 통해 연임 제한 규정까지 뜯어고쳤다. 이에 따라 내년 3월 대선에 출마해 최소 2036년까지 권좌에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자신의 표현대로 “등 뒤에서 칼을 맞은” 이번 반란으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래픽=양진경

영국 BBC와 독일 도이체벨레 등에서 러시아 전문 기자로 활동한 콘스탄틴 에거트는 미국 자유유럽방송 인터뷰에서 “푸틴 체제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푸틴이 자신의 체제에 대해 갖고 있던 장악력뿐 아니라 전쟁(우크라이나 침공) 수행 능력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며 “푸틴 체제를 떠받들어 온 러시아 공무원 수백만 명도 혼돈에 빠져들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 역사가 스티븐 코트킨은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 인터뷰에서 푸틴이 “디지털 싸움에서 프리고진에게 패배했다”고 진단했다. 프리고진이 텔레그램을 통해서 전 세계가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며, 인터넷에 서투른 푸틴을 완전히 압도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상황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이 불안에 휩싸인 고객들의 뱅크런(예금 빼내기)으로 파산한 것에 빗대면서 “러시아군이 내부에서 붕괴되기 시작한다면, 뱅크런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가능성이 크고 그 동력은 텔레그램일 것”이라고 했다.

한때는 절친이었는데… -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오른쪽)의 무장 반란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0년 프리고진이 자신의 급식 공급 식품 공장을 시찰하러 온 당시 푸틴 총리를 안내하는 장면이다. /AFP 연합뉴스

미국의 유명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프리고진의 모스크바 입성을 코앞에 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이 보인 반응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번 반란에 많은 러시아인이 열광하거나 심드렁했을 뿐, 푸틴을 지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며 “(푸틴을 대체할) 다른 체제의 수립을 당연히 여기는 듯 보였다”고 했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6일 본지 통화에서 “이번 반란이 향후 러시아에 미칠 영향을 판단하긴 섣부르다”면서도 “반란 직후 TV 연설에서 반역자를 단호히 처벌하겠다고 했던 그가 하루 만에 협상을 하고 주동자는 망명 보내주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뜻밖이었다”고 말했다.

6월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로스토프나도누의 거리에서 두명의 지역 남성이 철수하는 바그너 그룹 군인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번 사태가 푸틴 체제의 즉각적인 종말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러시아 연방 체제의 원심력을 가속화해 푸틴 체제의 붕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991년 해체된 소련을 사실상 물려받은 러시아 연방에는 사하·코미·카렐리야·부랴트·타타르·체첸 등 소수민족 자치공화국 22개가 소속돼 있다. 푸틴 체제의 장악력이 약해질 경우 1994년 발발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체첸 사태와 유사한, 소수민족 봉기가 재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약해진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엘리트들이나 러시아 내 체첸·타타르 등 지도자들의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반란 주도 세력이 용병 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내전 가능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했다.

푸틴이 구(舊)소련 체제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비슷한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1991년 6월 고르바초프 정권의 개혁 조치에 반발한 공산당 보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한 달여 만에 진압됐다. 그러나 이 여파로 소련 체제하 국가들이 줄줄이 독립 선언을 하면서 소련은 급속도로 해체의 길을 걸었다. 고르바초프는 결국 그해 12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1991년 쿠데타 상황과 마찬가지로 프리고진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이 푸틴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한편 반란 주도자인 프리고진이 이틀째 잠행하고 있어 그의 행적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프리고진은 지난 24일 자신이 접수한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의 군 사령부에서 차량 편으로 벨라루스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후의 구체적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소셜미디어에서 자주 활동했던 프리고진이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며 “프리고진의 앞날이 어떨지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반란이 하루짜리로 끝난 배후에 러시아 정보 당국의 개입이 있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프리고진이 전격적으로 모스크바행 진군을 중단한 것은, 그의 가족이 러시아 정보원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