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세계무역기구(WTO) 본부에 WTO 로고가 표시돼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유엔 안보리뿐 아니라 다른 국제기구와 국제협약도 제 기능을 못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195국이 비준했던 파리기후협약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에 불공평하며 미국민들에게 손해를 준다”며 일방적으로 탈퇴해 위기를 겪었다.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자 온실가스 2위 배출국인 미국의 탈퇴가 파리협약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때 미국은 유네스코(UNESCO), 유엔인권이사회(UNHRC),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탈퇴했다. 대통령 직권으로 국제 질서를 손쉽게 흔들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트럼프가 물러나고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이 파리기후협약과 유네스코 등에 차례로 복귀했지만, 내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이기면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변수가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역시 지난 30년간 국제 교역 활성화를 이끌어왔지만, 미·중 경쟁과 선진국·개발도상국의 관세 분쟁 여파로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일방적 관세 부과가 WTO 규정 위반이라고 비난하며 사사건건 맞서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WTO는 2013년 이후로는 새로운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고, WTO의 분쟁해결기구(DSB)는 위원을 충원하지 못해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WSJ는 “지난 수년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이 세계화 기조를 리쇼어링(제조 시설을 자국으로 이전하는 것)과 프렌즈 쇼어링(제조 시설을 동맹국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며 WTO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품은 회원국이 많다고 전했다.

WHO는 코로나 팬데믹 당시 리더십 부재와 중국 편향적 태도가 무용론에 불을 붙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코로나 사태 초기에 코로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발언을 거듭해 “사무총장에 선출될 때 중국의 지원을 받아 중국 편에 선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렀다. 시사 잡지 디애틀랜틱은 “WHO가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사람 간 전염은 없다’는 중국 정부의 거짓 주장을 되풀이했고, 결정적 예방 시점을 놓치게 만들었다”며 스스로 위상을 추락시켰다고 지적했다.

이상현 세종연구소장은 “초국가적 협력이 급격히 줄어들고 의미도 퇴색한 현 상황에 대해 ‘국제 질서 붕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