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훈련생과 대화하는 수낙 - 리시 수낙(맨 왼쪽) 영국 총리가 지난 21일(현지 시각) 런던 인근의 ‘리틀 유니버시티 칼리지’를 방문해 교육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수낙 총리가 최고 40%에 달하는 영국의 상속세를 점진적으로 폐지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로이터 뉴스1

상속세의 원조 격인 영국이 200년 넘게 유지해온 상속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 말 실시될 예정인 총선을 앞두고 상속세 폐지 여론이 높아진 데 따른 조치다. 영국 정치권은 소득세 등을 이미 장기간 내 가며 축적한 자산을 자녀에게 물려줄 때 상속세란 형태로 다시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부당하다고 보고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24일(현지 시각) 영국 더타임스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단계적 상속세 폐지 방안을 마련해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다음 달 보수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초안을 마련하고 나서 하원 선거 대표 공약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1796년 상속세를 도입한 영국은 32만5000파운드(약 5억4000만원) 초과 유산에 40%의 단일세율을 적용한다. 최고세율 기준으로 일본(55%)·한국(50%)·프랑스(45%)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넷째로 높은 세율이다. 다만 누진세율 구조인 일본 등과 달리 단일세율이란 면에서 세금 부담이 더 높다고도 볼 수 있다. 수낵의 계획대로 세제가 개편될 경우 영국은 캐나다(1971년)에 이어 G7(7국) 중 둘째로 상속세를 폐지하는 국가가 된다. 수낵 총리는 지난달 보수당 행사에서 “국민의 (성공에 대한) 열망을 지지하기 위해 상속세 문제에 손을 대는 것”이라고 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20세기 들어 귀족 등 극소수의 부자를 대상으로 각국에서 도입되기 시작한 상속세는 자산 가치기 상승하며 중산층까지 큰 영향을 주는 세금이 됐다. 국민 불만이 커지고 높은 상속세를 피하려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는 부작용이 발생하자 캐나다에 이어 호주(1979년), 스웨덴(2005년), 노르웨이(2014년) 등 OECD 10국이 상속세를 이미 폐지했다.

1950년 상속세를 도입한 한국은 10억원 초과 유산에 대해 최고 55%의 상속세를 매긴다. 2020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사망을 계기로 과도한 상속세에 개편 방안이 검토됐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는 상황이다.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과거 대부분 국가는 탈세 등으로 피했던 소득세를 사망 시점에 상속세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걷기 위해 제도를 도입했다”며 “투명하고 정확하게 과세가 되는 지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명분을 잃은 세금”이라고 했다.

영국의 많은 국민과 보수당은 자산이 축적되는 과정에 소득세 등을 이미 냈기 때문에 상속세는 부당하다고 보고 있다. 더타임스는 최근 “유권자들은 이미 세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마련한 자산에 대한 상속세 부과가 부당하다고 여긴다”며 “상속세는 국민이 가장 혐오하는 세금”이고 전했다. 영국 여론조사 기업 유고브가 지난해 계층·연령별 성인 17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선 ‘상속세 완전 폐지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48%로 반대(37%)보다 높았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상속세 도입 당시의 환경과 지금의 현실이 다르다는 것이다. 애초 영국이 상속세를 도입하고 강화한 배경에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이후 경제적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과 함께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하지만 1940년 들어 세율이 40%대로 치솟자 “차라리 집을 부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최근 들어 자산 가치가 높아지는 반면 상속세 제도가 이를 잘 따라가지 못하면서 부유층이 아닌 중산층마저 세금을 내게 되자 불만이 거세졌다. 영국 재정연구소(IFS)의 폴 존슨 소장은 “자산을 해외로 빼돌릴 수 있는 부자들은 오히려 손쉽게 상속세를 피하지만 집 한 채가 전 재산인 가정은 꼼짝없이 세금을 낸다”고 지적했다. 재산이 최소 3조원으로 추정되는 찰스 3세 국왕 등 왕실은 상속세 대상이 아니라는 점도 불만을 키웠다.

그래픽=양진경

상속세에 대한 여론 악화로 미국·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도 상속세 폐지나 완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3월 케빈 크레이머 미국 상원의원(공화당·노스다코타)은 존 튠 상원의원(공화당·사우스다코타)과 함께 연방 상속세를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크레이머 의원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누구나 워싱턴DC(연방 정부)가 부과하는 엄청난 세금 청구서를 받아보게 된다. 상속세를 없앤다면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생기고, 중소기업과 농장은 보호되며, 가족의 유산은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500만달러였던 상속세 공제 한도를 1000만달러(약 133억원)로 2018년 상향 조정했다. 현재 미국의 상속세 공제 한도가 한국(10억원)의 13배 수준에 달한다는 뜻으로, 1000명 중 한두 명 정도 극소수만 상속세를 내고 있다. 그럼에도 폐지론은 꾸준히 나온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상속세를 내려면 농장을 팔아야 한다”면서는 상속세를 ‘죽음의 세금(death tax)’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도 상속세 개편 논의가 진행 중이다. 지난해 4월 대선을 앞두고 대부분의 후보가 10만유로인 상속세 자녀 공제 한도를 최대 30만유로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상속세 최고세율이 55%로 우리나라보다 높지만, 가업 상속 제도가 발달해 있다. 비상장 중소기업의 경우 주식 상속에 따른 상속세 전액에 대해 5년간 납부 유예 제도를 운영한다. 자녀가 선친이 물려준 회사 대표를 계속 맡으면 5년이 지나서도 상속세를 물지 않아도 된다. 한국도 지난해 말 법 개정을 거쳐 상속세 납부 유예 제도를 도입했지만, 고용·지분율 등 사후 관리 요건이 엄격한 편이다.

OECD와 한국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OECD 회원국(38국) 가운데 상속세가 있는 나라는 23국이다. 이 가운데 한국·미국·영국·덴마크 등 4국은 ‘유산세’ 방식을, 일본·프랑스·스페인·아일랜드 등 19국은 ‘유산취득세’ 방식을 택한다. 유산세는 유산 총액을 기준으로 세금을 정하고 이를 자녀들이 ‘N분의 1′로 나눠 부담하는 방식이다. 유산취득세는 자녀 한 명이 실제로 받는 유산에 대해 각각 상속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이 경우 자녀 각자에게 공제 혜택을 주고 비교적 낮은 세율이 적용돼 세금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유산취득세를 적용하는 19국 가운데 룩셈부르크·리투아니아·슬로베이나·헝가리는 자녀 상속의 경우엔 상속세율이 0%다. OECD 회원국 중 15국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처럼 원래 상속세 제도가 없었거나 상속세를 폐지한 경우다. 상속세가 없는 나라 중 대부분은 물려받은 재산에 대해 소득세나 자본이득세 형태로 세금을 부과해 제도를 보완하고 있다. 상속받은 재산도 다른 소득처럼 가정해 이에 따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5년 상속세 제도를 폐지한 스웨덴의 경우 물려받은 재산을 향후 자녀가 처분하는 경우 양도소득세를 엄격하게 과세한다. OECD 이외 국가 가운데 러시아·중국·인도 등도 상속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