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해 발발한 전쟁이 17일째를 맞은 23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망자가 6500명에 육박했다. 이 중 77%(5000여 명)가 팔레스타인 인원으로 추정된다. 본지는 이스라엘 못지않게 피해를 본 팔레스타인 주민들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주민, 한국에 거주 중인 팔레스타인 출신 유학생과 인터뷰했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치위생사로 근무 중인 파팀 모하메드 알리(24)는 23일 본지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가자지구는 물론이고 서안지구에서도 이스라엘군의 횡포가 극심해져 맞아 죽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늘고 있다”며 “한국 국민들도 팔레스타인이 맞닥뜨린 잔혹한 현실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알리가 ‘미스터 션샤인’을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이들이 일제 탄압에 시달렸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아직도 매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며 “다른 나라가 조국을 침략하고 민족을 몰살하려 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한국인들이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8년 전 알리의 오빠는 시비 거는 이스라엘군에게 맞서다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알리 집으로 쳐들어와 온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 아버지를 잡아갔다고 한다. 알리는 “여전히 이스라엘군은 수시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때리고 동물처럼 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모든 이스라엘인이 전쟁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 “오로지 팔레스타인을 파괴하길 원하는 이스라엘의 현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이번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알리는 감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옥 같은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번 전쟁의 배경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물과 전기 등 각종 자원을 통제해온 데다 인터넷을 포함한 모든 통신 감시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사생활도 앗아갔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부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사람들은 거주지를 마음대로 옮길 수 없었고, 외출할 때도 수시로 이스라엘 군인들의 잔혹한 검문을 받아야 했다”며 “이 경우 스마트폰에서 ‘하마스’와 관련된 내용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으면 아무런 사법적인 보호 조치 없이 심각한 구타를 당하거나 감옥에 6개월 수감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에 자신들은 무결하고 하마스가 테러리스트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이번 전쟁에서 집과 학교, 병원, 상점을 무차별 폭격해 민간인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자지구에 남은 친척들 생사가 어떻게 될지 매일 마음 졸이고 있어요. 얼마 전 이스라엘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이웃 17명은 모두 어머니 지인이에요.”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한국외대에서 유학 중인 대학생 사바 아부아타야(20)는 이날 본지에 “친척들 안부를 확인하려고 매일 전화, 메신저로 연락하는데 전쟁으로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친가 친척들은 아직 가자지구에 살고 있고, 어머니 쪽 친척들은 레바논과 요르단 등으로 가는 피란길에 올랐다. 하마스의 기습 이후 이스라엘의 보복 공습으로 아부아타야의 가족이 살던 동네는 쑥대밭이 됐고, 그의 가족이 살던 집도 무너져 내렸다.
독일에서 자랐지만 어릴 적 가족들을 만나러 가자지구를 여러 차례 방문했던 그는 “이스라엘은 거대 장벽으로 가자지구를 둘러싸 ‘도시 감옥’을 만들었다”며 “식료품과 의약품 등 생존에 필요한 자원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민간인을 납치해 인질로 삼고 살해한 것에 대해선 “전쟁에서 민간인이 희생되는 일은 항상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함부로 죽이고 구금하는 이스라엘의 악행에 대해선 아무런 지적이 없다가, 하마스의 일부 잔혹성만 강조해 악마화하는 건 서방 언론의 매우 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서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요르단 국적 팔레스타인인 압둘라 드위카트(41)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 반격할 때는 서방 세계 모두 우크라이나 편에 섰으면서, 왜 팔레스타인의 경우만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며 외면하느냐”고 했다.
이처럼 본지가 연락한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이 이번 전쟁의 직접 원인이 됐다는 사실보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핍박이라는 역사적인 맥락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조명되지 않은 채, 서방 세계에서 하마스가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매도되는 현실이 매우 슬프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하마스의 테러가 ‘독립운동’의 수단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드위카트는 “서방은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는데, 다른 국가들도 누군가 자국 땅을 침략했을 때 방어하려고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가”라며 “우리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 알리도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방 세계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역시 평화를 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드위카트는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전하게 살 권리,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가질 권리,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아이들을 두려움 속에서 키우지 않을 권리”라며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고 무기를 쓰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아부아타야도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유대교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자유롭게 사는 평화를 원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