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J. 심슨과 그의 전처 니콜 브라운. /연합뉴스

“한 때 최고의 미식축구 스타였지만 인종과 형사 사법 제도에 대한 전국적 논쟁을 촉발시킨 살인사건 재판의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다.”(월스트리트저널)

1970년대 미(美) 프로 미식축구(NFL) 최고의 러닝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이혼한 전처(前妻)를 잔인하게 살인한 혐의를 받는 피고인으로 전락했던 O. J. 심슨이 10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살인 혐의와 관련된 재판은 심슨이 당대 최고의 선수였고 이른바 ‘흑인 성공의 아이콘’이었다는 점에서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폭동 사건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 사회에 남아 있는 인종 갈등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사회적 의미가 있다. 또 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을 내리면서 미 형사사법 제도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인 배심원제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뛰어난 운동선수이자 ‘성공한 흑인’

심슨의 가족은 11일 X(옛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에서 그가 10일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뉴욕 포스트에 따르면 전립선암을 겪은 그는 이날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숨을 거뒀다. 심슨은 운동선수로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969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버팔로 빌스에 들어온 그는 1973년 NFL 선수 최초로 2000야드 이상을 뛰며 MVP를 거머쥐었다. 당시 기록한 게임당 143.1 야드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1979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1985년 프로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각종 방송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렌터카 회사 등 대기업의 광고를 찍기도 했는데 당시만 해도 흑인 선수들에게는 보기 드문 ‘성공’ 사례였다. 하지만 그의 황금기는 여기까지였다. 심슨은 1979년 첫 아내와 이혼한 뒤 1985년 두 번째 아내인 니콜 브라운과 결혼했다. 이후 1992년 브라운은 이혼을 신청했고 둘은 결국 갈라섰다.

1994년 6월 17일 심슨은 경찰에 출석하지 않은 채 도주했다. SUV(오른쪽 하얀색)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심슨. /AFP 연합뉴스

모두의 눈앞에서 몰락한 수퍼스타

1994년 6월 13일 새벽 미국 캘리포니아주 브렌트우드 주택가에서 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과 애인 론 골드먼이 흉기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됐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장갑과 같은 켤레의 피묻은 장갑을 심슨의 집에서 발견하고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에 출두하겠다고 한 심슨은 “나는 니콜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편지를 남긴 뒤 도주했고, 흰색 SUV 차량을 타고 도주하는 그를 경찰이 LA 고속도로에서 추격전을 벌여 붙잡았다. 미 방송사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100km 이상 계속된 이 추격전을 생중계했고, 약 9500만명이 시청했다. 경찰과 대치 끝에 차에서 내린 인물은 흑인들의 영웅이자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인 심슨이었다. 눈앞에서 수퍼스타의 추락을 목격한 미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O. J. 심슨은 1994년 전처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배심원단에서 무죄 평결을 받고 풀려났다. 사진은 그가 범행 당시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죽장갑을 심슨이 법정에서 착용하는 모습. 장갑이 손보다 작았고, 그의 무죄 평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AFP 연합뉴스

법정을 삼킨 인종문제

LA 검찰은 6일간 조사 끝에 심슨을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왼쪽 장갑에서 심슨의 DNA가 검출됐고, 심슨의 양말에서 니콜의 DNA가 나오는 등 확보한 증거는 심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심슨은 그동안 모았던 재력을 바탕으로 6명의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당시 ‘드림팀’이라고 불린 이들은 정확한 액수가 공개된 적은 없지만 500만 달러 이상의 수임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다. 모두가 심슨의 유죄를 확신했던 이 사건은 법정 공방을 거치며 조금씩 변해갔다. 심슨의 변호인단은 증거가 인종차별주의자인 경찰들에 의해 조작됐고, 경찰의 증거 초기 확보도 부실했다며 빈틈을 파고들었다. 특히 심슨은 재판 과정에서 검찰이 범행에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가죽장갑을 착용했는데, 심슨의 손에 전부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사이즈가 작았다. 눈앞에서 이를 본 배심원단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변호인단이 372일간 인종차별에 대한 여론몰이와 증거 부실을 파고든 결과 1995년 10월 3일 미국 배심원들은 4시간도 채 되지 않아 ‘무죄’ 평결을 내렸다. 당시 심슨의 평결이 발표되던 순간 TV 시청률은 걸프전 때를 능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심슨은 무죄평결의 기쁨 속에 흰색 밴을 타고 LA 카운티 교도소를 떠났다.

1995년 10월 3일 배심원단은 심슨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죄를 받아들면서 배심제 등 미 형사 사법 제도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법 제도의 허점

심슨 사건은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배심제’라는 형사 사법 제도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심슨의 변호인단은 배심원 12명 중 9명이 흑인이라는 점을 공략 포인트로 삼아 집요하게 ‘경찰의 인종차별’ 문제를 파고들었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눈앞의 증거물보다 변호인단이 펴는 감정적 수사법에 휩쓸리기 쉬웠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심슨이 범인이라는 상당한 과학적 증거와 정황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은 무죄평결을 내렸다”면서 “이 재판은 사법재판사에 오점을 남겼다”고 했다. 피해자인 골드먼의 아버지는 “패배한 것은 검사들이 아니라 이 나라의 사법제도”라고 하기도 했다. 미 사법 제도상 1심에서 무죄가 난 사건은 검찰이 항소를 할 수 없어 그대로 확정된다. 전처의 부모는 끝까지 심슨이 딸을 죽인 법인이라고 주장해 민사법원에서는 심슨에게 배상금 3350만달러를 유족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형사재판에서는 무죄였지만 민사재판에서는 유죄로 보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심슨은 무장강도 사건에 연루돼 9년간 복역했다가 2017년 가석방으로 풀려나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1990년대 미 사회에 존재하던 고질적인 인종 갈등 문제와 사법 체제의 허점을 민낯 그대로 투영한 ‘O. J. 심슨 사건’이 발생한 지 정확히 30년 되는 올해까지 이 사건은 미제(未濟)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답을 알고 있는 심슨은 영원히 입을 열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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