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이 19일 사거리 약 300㎞인 미국산 장거리 타격 무기 에이태킴스(ATACMS·미 육군 전술 미사일 시스템)를 이용한 러시아 내 군사 목표물 공격을 시작했다. 미국이 에이태킴스 등을 이용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타격을 허용키로 했다는 보도가 나온 지 이틀 만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의 핵 공격 가능 범위를 넓힌 ‘핵 교리(핵무기 사용 규정)’ 개정안에 공식 서명해 우크라이나와 미국에 대한 ‘동시 핵 보복’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내년 초 미국의 정권 교체를 앞두고, 2022년 2월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더 확대될 위험이 커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키이우포스트 등 우크라이나 매체들은 이날 우크라이나 총참모부 발표를 인용해 “에이태킴스를 이용한 러시아 내 북한 관련 목표물 타격이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이들 매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에서 약 130㎞ 떨어진 러시아 브랸스크주 카라체프의 군사 시설이 표적이 됐다. 이곳엔 탄약과 미사일 등 대량의 북한산 무기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알려졌다. 러시아 국방부도 “우크라이나가 에이태킴스로 브랸스크주 우리 영토를 공격했다. 여섯 발 중 다섯 발을 요격했다”고 이를 확인했다.
러시아는 핵 위협을 강화하며 즉각 대응에 나섰다.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이날 러시아의 새로운 핵 교리인 ‘핵 억제 분야 국가 정책의 기초’를 승인하는 법령에 최종 서명했다”고 보도했다. 새 핵 교리는 비(非)핵보유국이라도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공격히면 이를 ‘공동 공격’으로 간주해 두 나라 모두 핵무기로 보복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산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의 중요 군사 시설을 계속 타격하면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에도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노골적 위협인 셈이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G20(20국) 정상회의에서 러시아 대표단을 앞에 두고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 협력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러시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에 의해 국제 식량 안보 위협을 가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부터 러시아 본토에 미국산 장거리 타격 무기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반복해 요구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러시아가 이를 ‘확전 행위’로 받아들일 것을 우려해 허용하지 않았다. 지난 5월 러시아의 하르키우 공세로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이를 일부 허용했으나, 에이태킴스 등을 이용한 러시아 영토 깊숙한 지역에 대한 공격은 계속 금지했다.
미국의 태도는 지난달 말 북한군 1만2000여 명의 러시아 파병이 확인되고, 이들이 최근 우크라이나군과 교전을 시작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미 대선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장거리 타격 무기의 사용 제한 해제 결정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라며 “트럼프 당선인의 내년 1월 취임 전에 우크라이나에 힘을 더 실어주려는 의도도 있다”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레드라인(한계선)’이 무너진 셈이다. 그는 이미 지난 9월부터 미국과 서방 동맹국을 대상으로 “장거리 타격 무기 사용 제한을 해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보내왔다. 그는 “(미국과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타격 무기를 이용한) 러시아 본토 타격을 허용하면 이 전쟁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무장관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동반 방문해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타격 무기의 사용 제한 해제 요구를 신속히 검토하겠다”고 밝히자 “핵 교리를 개정하겠다”고 위협했다.
미국이 결국 우크라이나에 장거리 미사일 타격을 허락하자 러시아는 바로 핵 교리 개정안을 19일 승인하면서 핵무기 사용의 ‘문턱’을 낮췄다. 새 핵 교리는 이날부터 바로 적용된다. 변경된 교리의 첫째 핵심 내용은 “비핵보유국이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아 공격해 오면, 이를 두 국가의 공동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를 공격하는 나라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이 나라가 핵무기 보유국의 무기 지원을 받을 경우, 해당 국가는 물론 이 국가를 지원한 나라도 핵무기 공격의 대상이 된다. 기존 핵 교리가 ‘핵무기를 보유한 교전 당사국’만 핵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비해 대상을 크게 확대했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비핵보유국은 우크라이나, 핵보유국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이 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날 “이번 핵 교리 개정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비핵 미사일을 사용하더라도 러시아의 핵 대응이 뒤따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둘째로 추가된 내용은 “러시아와 동맹국에 대한 미사일·항공기·무인기 공격, 또 이러한 공격이 대규모로 이뤄진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있으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한다”는 내용이다. 기존 핵 교리는 러시아가 핵 공격을 받았을 때, 혹은 전면전 상황에서 적의 지상군에 의해 수도 모스크바가 위협받는 등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경우’에 한정해 핵 보복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번 개정으로 현재 전장에서 흔히 쓰이는 미사일·드론(무인기) 등을 이용한 공습만으로도 ‘러시아의 피해 규모가 크다고 판단될 경우’ 핵무기를 쓸 수 있게 됐다. 핵무기 사용 기준을 크게 완화한 셈이다. 타스통신은 “새 교리는 핵 억지력의 대상이 되는 국가와 군사동맹의 범위, 또 그러한 억지력이 대응하는 군사 위협의 목록을 확장했다”며 “러시아는 주권을 위협하는 재래식 무기 공격, 러시아 영토를 겨냥한 적 항공기와 미사일·드론의 대규모 공격, 동맹국인 벨라루스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도 핵 대응을 고려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영국과 프랑스도 스톰 섀도·스칼프 미사일(사거리 약 250㎞)의 러시아 본토 공격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군이 장거리 타격 무기들을 러시아 본토 공격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면 러시아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공산이 크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닿지 않는 전선 인근 자국 영토에 보급 기지를 설치하고, 이곳에 물자와 예비 병력을 모아 놓은 뒤 필요할 때마다 전선에 계속 투입하는 방식을 써왔다. 또 전선에서 200~300㎞가량 떨어진 자국 후방의 공군 기지를 우크라이나 공격의 핵심 기지로 활용해왔다. 미국 전쟁연구소(ISW)는 “에이태킴스의 사거리 내에 있는 러시아 중요 군사 시설만 245개”라며 “이 중 러시아군 전력에 핵심적인 공군 기지가 15개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핵 교리’
핵무기 보유국이 자국의 핵무기를 언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정해 놓은 문서다.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 외국의 공격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미국은 4~8년 주기로 발간되는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통해, 러시아는 ‘핵 억제 분야 국가 정책의 기초’ 법령을 통해 자국의 핵 교리를 공개하고 있다. 핵보유국의 안보와 군사 전략에서 핵무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유사시 외국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파악하는 지침도 된다.
-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39
🌎국제퀴즈 풀고 선물도 받으세요! ☞ https://www.chosun.com/members-event/?mec=n_qu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