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국민연합(RN)과 좌파 연합(신인민전선)의 거야(巨野)가 이끄는 프랑스 하원이 4일 미셸 바르니에(73)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바르니에 총리와 그가 이끄는 프랑스 정부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프랑스 정국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질 전망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 야당의 반대를 뚫을 새 총리를 찾아 내놓거나, 아니면 야당이 내세우는 총리 후보를 받아들여야 하는 난제를 안았다.
프랑스 하원은 이날 오후 7시 40분(현지시각) 3시간 넘게 벌어진 바르니에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 토론을 마친 뒤 즉각 투표에 들어가 총 331명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570여명의 여·야 의원들 대부분이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투표에는 불신임안 발의에 동의한 의원들만 참여했다. 찬성표를 던진 331명은 전체 야당 의원수 364명의 91%에 해당한다. 이는 불신임안 통과에 필요한 재적 의원 과반(288명)을 훌쩍 넘긴 것이기도 하다.
바르니에 총리는 이르면 5일 중 사임 의사를 밝힐 전망이다. 프랑스 헌법 50조는 “의회에서 불신임된 총리는 대통령에게 사임계(사표)를 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총리가 언제까지 사임해야 한다는 세부 규정은 없으나, 즉시 사임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 학자들의 중론”이라고 전했다. 총리가 대통령에게 추천해 구성한 내각 구성원(각 부 장관)들 역시 모두 물러난다. 다만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임시(interim) 총리·각료로 일하면서 일상 업무의 공백을 막는다.
이번 불신임안은 바르니에 총리가 지난 2일 정부가 의회의 표결 없이 단독 입법할 수 있도록 하는 헌법 49조 3항을 발동하면서 제기됐다. 그가 지난 10월 내놓은 내년도 예산안과 관련 법안이 야당의 거센 반대에 막혀 처리되지 못한데 따른 것이다. 바르니에 총리의 예산안은 재정 적자 해소를 위해 400억 유로(약 60조원)의 공공지출을 절감하고 대기업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200억 유로(약 30조원) 규모의 증세를 하는 것이 골자다. 야당은 그러나 이 새 예산안이 프랑스 국민과 기업의 고통을 가중한다며 반대했다.
특히 RN은 전력 소비세 인상안과 의약품 환급 축소 철회, 최저 연금 인상, 저소득 근로자에 대한 사회보험료 면제 혜택 등을 요구하며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 예산안과 관련 법안 통과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바르니에 총리는 이에 RN의 요구 중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으나, RN은 “4개 요구가 모두 관철되어야 한다”며 협조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신임안은 당초 통과가 유력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소속된 앙상블과 공화당, 민주운동(MoDem), 호라이즌 등 여권의 의석수가 전체 의석의 약 37%인 211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면 제1야당인 RN(125석)과 극좌 굴복하지 않은 프랑스(LFI·71석)가 이끄는 좌파 연합의 의석을 합치면 총 350석에 육박한다. 일간 르피가로 등 프랑스 주요 매체들은 “워낙 의석차가 커서 대결 자체가 안됐다”며 “예상했던 결과가 나온 셈”이라고 평가했다.
프랑스 총리가 의회의 불신임으로 물러나는 것은 1962년 10월 조르주 퐁피두 정부 이후 62년만의 일이다. 바르니에 총리는 특히 임명된지 불과 91일만에 불신임돼 ‘1958년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최단명 총리’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기존 최단명 총리는 사회당 출신의 베르나르 카즈뇌브 전 총리(161일)였다. 그는 2016년 12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됐다. 2017년 대통령 선거를 불과 5개월여 앞둔 시점이었다.
극우·극좌가 중심이 된 야권은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썼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극좌 LFI의 마틸드 파노 원내대표는 “바르니에 정부가 폭력적인 예산과 함께 몰락했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라고 했다. 르펜 RN 원내 대표도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파노 원내대표는 또 “민주주의에서 유일한 주권자는 국민이고,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며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인 마크롱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바르니에 총리가 밀어부쳤던 새 예산안과 관련 법안은 불신임안 통과와 함께 입법이 무산된다. 르몽드는 “연내에 새 예산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망했다. 새 총리 임명을 아무리 서둘러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이다. 다만 미국과 달리 새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더라도 미국과 같은 ‘셧다운(shutdown·정부 업무 마비)’ 사태는 벌어지지 않는다. 프랑스 헌법 47조와 ‘공공재정법’이 전년도 예산을 바탕으로 필요한 기본 지출을 월 단위로 집행할 수 있도록 안전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 기념식이 열리는 7일 이전에 새 총리 임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 총리 후보로는 마크롱의 측근인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국방장관, 프랑수아 바이루 MoDem 대표, 브루노 르타이오 내무부 장관, 베르나르 까즈뇌브 전 총리 등이 거론되고 있다고 르피가로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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