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지에서 공연한 오페라 ‘라인의 황금’ 속 장면들. 연출가들은 바그너의 원작 오페라 속 황금과 황금으로 만든 반지를 가상 화폐(왼쪽), 액체(가운데), 어린아이(오른쪽) 등 시대상을 반영한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해서 그려냈다./파리 국립 오페라 극장, 로열 오페라 하우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지난달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한 파리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에서 주인공인 알베리히는 와이셔츠에 넥타이, 정장 바지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다른 배우들도 맨해튼이나 실리콘밸리에서 볼 수 있는 기업인 옷차림이었다. 원작에 나오는 ‘황금’은 가상 화폐로 그려졌다.

‘라인의 황금’은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4부작 ‘니벨룽의 반지’ 중 1부에 해당한다. ‘니벨룽의 반지’는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신과 거인, 난쟁이 니벨룽족(族)이 절대 권력의 상징인 반지를 차지하고자 투쟁하는 이야기다. 황금은 반지를 만드는 재료다. 이 때문에 보통 출연자들은 대개 태곳적 느낌이 물씬 나는 의상을 입고 나왔다. 그런데 스페인 연출가 칼릭스토 비에이토가 맡은 이번 파리 공연은 무대를 21세기 현재로 바꾸고 캐릭터들을 빅테크 기업가로 바꿨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바그너의 반지 연작에서 연출가들은 어떤 황금을 캤나’라는 제목으로 ‘니벨룽의 반지’가 다채롭게 변형되는 흐름을 짚었다. NYT는 “연출가들은 작품 속 황금을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 공연 시점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원으로 비유하며 이 작품을 재해석해 왔다”고 전했다.

배리 코스키가 연출한 2023년 런던 왕립 오페라 극장 공연에선 용암처럼 콸콸 흐르는 액체 형태의 황금이 등장했다. 황금을 비롯한 자연 자원을 ‘지구의 혈맥’으로 보고 인류가 자연 광물을 착취해 온 역사를 빗댄 것이다.

같은 해 벨기에 브뤼셀 왕립 극장에서 공연된 로메오 카스텔루치 연출 버전에서는 황금이 여성의 몸으로 뒤덮인 모습으로 보이는 등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2022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 때 오른 발렌틴 슈바르츠의 연출 버전에서 황금으로 만든 반지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황금을 석유로 변환한 버전도 있다. 2013년 역시 바이로이트 무대에서 연출가 프랑크 카스토르프는 무대를 미국 횡단 도로와 광활한 자원이 묻힌 카스피해로 바꿔 인간의 물욕을 그렸다.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재해석은 초연 10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리던 1976년 바이로이트 축제 때부터다. 당시 프랑스 연출가 파트리스 셰로는 작품 속 신화가 사회적 모순을 보여주기 적합하다고 여겨 배경을 산업혁명 시기 도시 변두리로 옮겼다. 이후 21세기 들어 ‘황금의 변형’이라는 형태로 다채롭게 재해석되는 양상이다.

NYT는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에 옮기는 오페라 연출가들의 공통된 인식을 ‘황금을 그저 황금으로 볼 수는 없다’라고 요약했다. 시대를 초월하고, 그 안에서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무언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시대 상황을 반영한 다양한 형태의 ‘황금’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파리 공연의 연출가 비에이토는 “이제는 신이 아닌 인간의 시대”라며 “이야기 속 인물들이 세상을 파괴하고 새로이 만들기도 하는 과정 뒤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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