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로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개시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러시아를 주요 7국(G7) 협의체로 복귀시키자는 뜻을 밝혔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사전 통보 없이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 협상에 나서고,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할 의지까지 밝히면서 이번 협상이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제쳐놓은 채 강대국 주도로 흘러갈 우려가 제기된다.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취재진에게 “러시아의 G7 퇴출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다른 몇몇 사람이 저지른 실수”라며 “러시아가 G8에 남아있었다면 애당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국제사회가 러시아와 외교적 대화와 경제 협력을 지속했다면 긴장이 높아지지 않았을 것이란 취지다. 트럼프는 ‘푸틴이 평화를 원한다고 한 말을 믿냐’는 질문에는 “나는 그를 잘 안다. 그가 이번에는 정말 평화를 원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기 집권 당시(2017~2021년)에도 러시아의 복귀를 주장해 왔다. 하지만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 대한 일방적 침공에 따른 제재 성격의 G8 퇴출이었던 만큼, 프랑스·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재합류에 반대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전날인 12일 푸틴 대통령과 전화를 마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은 불가능하며, 우크라이나의 영토 완전 수복 가능성도 없다”고 밝힌 뒤 나왔다. 러시아에 유리한 협상 조건을 내걸고, 침략당한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를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하는 모양새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즉각 반발했다. 그는 13일 “트럼프가 푸틴과 먼저 통화한 것은 유감이다. 독립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어떤 합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U 동맹국들도 미·러의 일방적 휴전안 도출을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성급한 해결책이자 더러운 거래(dirty deal)”라면서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협상 테이블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떤 합의도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워싱턴이 이미 크렘린에 양보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명령된(dictated) 평화는 거부한다”고 했다. 특히 유럽에선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러시아가 이번 종전 협상을 통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란 우려도 상당하다.
이번 합의를 1938년 뮌헨 회담에 비유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점령한 영토를 넘기며 히틀러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히틀러는 이듬해 폴란드 침공을 강행했다. 이번 협상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합리화하고, 러시아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13일 “우크라이나도 협상에 참여할 것”이라고 해명하고,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도 “우크라이나도 어떤 방식으로든 협상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미·러 간 협상은 급물살을 타는 모양새다. 이날 페스코프 대변인은 미·러 정상회담이 사우디 리야드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가 유럽의 안보 지형을 뒤흔들려는 러시아의 시도를 사실상 부추기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 협상이 마무리되면, 러시아와 중국이 참여하는 핵 군축 합의 채널을 만들고 싶다는 의사도 내비쳤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중국과 3자 정상회담을 갖고 강대국 간 국방비 삭감과 핵 합의를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모든 일(가자·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로잡은 뒤에 가장 먼저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과 회의를 열고 군사 예산을 절반으로 줄이자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금 있는 핵무기만으로 세계를 50번, 100번씩 초토화할 수 있는데도 그들은 새로운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 더 이상 만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지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단된 핵 군축 협의를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략 핵탄두 제한을 골자로 한 신(新)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을 체결했지만, 러시아는 2023년 2월 참여 중단 의사를 밝혔다.
트럼프가 푸틴과 접촉하는 면을 늘리려는 시도를 보이자 중국 외교부는 “양국의 소통과 대화 강화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속내는 복잡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미·러 관계가 개선되면,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협력에 균열이 발생할 수 있고 반(反)서방 연대의 확장을 꾀하고 있는 시진핑 주석의 계획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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