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협정 체결 후 자축하는 英총리 - 1938년 9월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독일에 떼주는 ‘뮌헨 협정’을 체결한 뒤 “우리 시대의 유럽에 평화를 가져온 합의”라고 자화자찬하며 선언서를 흔들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이듬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평화는 1년 만에 깨졌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휴전·종전 협상(평화 협상)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협상을 주도하고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와 주변국은 사실상 뒤로 밀려나는 듯한 상황이 1938년의 유럽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87년 전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는 이유는 뭘까.

그해 9월 영국·프랑스 등 유럽 패권국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독일에 떼주는 ‘뮌헨 협정’을 당사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를 사실상 배제하고 체결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의사를 노골화하자 ‘일단 전쟁은 피하자’는 명분 아래 강대국들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협정이었다.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 수상은 “유럽에 평화를 가져온 합의”라며 자화자찬했지만 나치 독일은 이듬해 9월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에 폴란드의 동맹국인 영국·프랑스가 선전포고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독일은 이미 뮌헨 협정 당시에 폴란드는 물론 프랑스·영국을 침공할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당시 유럽은 2000만명이 희생된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에 민족주의와 공산·반공주의, 반(反)유대주의 등이 분출하며 이념과 인종 갈등이 폭발하고 있었다. 결국 뮌헨 협정은 전쟁이 몰고 온 공포와 혼란 속에서 약자의 희생으로 평화를 얻겠다는 강대국의 편의주의가 낳은 비극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당시 미국과 유럽 일각엔 나치가 우생학을 바탕으로 주장한 인종적 우월성에 동조하는 여론이 존재했고, 나치 독일의 확장 정책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다는 분위기도 형성돼 있었다.

1938년의 상황은 국제 질서가 다시금 힘의 논리에 지배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많다. 1차 대전 이후 각국은 국제법과 집단 안보에 기반한 새 국제 질서를 추구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유엔(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을 1920년 창설했다. 그러나 미국의 불참에 이어 독일·일본 등 군국주의 국가들이 탈퇴하며 평화적 국제 질서 수립 노력은 실패했고, 1938년은 국제사회가 ‘약육강식’으로 돌아갔음을 확인시켰다. 소련(러시아)은 이듬해 폴란드를 독일과 반씩 나눠 갖는 것을 골자로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독일의 서유럽 침공을 방관했다. 서방 열강의 유화적 태도를 확인한 일본은 중국 침공의 고삐를 조이며 한반도에 대한 수탈과 강압을 심화했고, 미국·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침략 준비에 뛰어들었다. 이는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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