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여기까지 왔습니까.”
우크라이나 포로수용소의 북녘 청년 두 사람은 한국 기자가 찾아온 이유를 궁금해했다. “북한군 러시아 파병을 ‘가짜 뉴스’라고 하는 이들이 있어 직접 확인하러 왔다”고 하니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북한 청년들이 러시아 전쟁에 동원돼 수없이 죽고 다치고, 생포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못 믿겠다고 한다”고 고쳐 말하니, 말없이 눈길을 돌리며 고개를 떨궜다.
북한군이 러시아 쿠르스크에 파병돼 싸우고 있다는 증거는 차고 넘쳤다. 지난해 11월 말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매체를 통해 계속 쏟아졌다. 이어서 한국 정부, 미국,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까지 북한군 파병 사실과 전투 참여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가짜 뉴스’란 주장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 나왔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퍼뜨리듯 말이다.
지난달 11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결국 직접 북한군 포로의 사진을 공개했다. 이들이 북한 말씨로 신문(訊問)에 답하는 동영상도 일체의 모자이크나 음성 변조 없이 수차례 나왔다. 그런데도 ‘북한군 파병이 날조됐다’는 주장은 계속됐다. “조선족을 데려다 만든 영상이다“ “손가락이 이상한 것이 AI로 생성한 영상”이란 얘기가 대형 소셜미디어를 통해 버젓이 나돌았다. 어떤 이는 “챗GPT에 물어 보니 ‘현재까지 서방 언론과 국제 기구 등에서 북한군 파병 사실이 공인된 적이 없다’고 한다”며 “AI도 북한군 파병을 거짓말로 판단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기자의 일은 현장에 있다. 아무리 뛰어난 AI가 나와도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북한군 포로를 직접 만나기 위해 우크라이나 취재 경험이 있는 편집국 내 여러 기자들이 총동원됐다. 이들이 가진 우크라이나 내 인맥을 통해 우크라이나 정부와 언론, 재계 인사들과 전방위로 접촉하며 북한군 포로에 접근할 방법을 물었다. 기사가 나간 후 일각에서 ‘국정원 기획’ 인터뷰라는 음모론까지 나오는 모양이지만, 사실 이 모든 과정은 한국 정부에 비밀로 했다. 국내 정치 상황들이 빠르게 바뀌면서 관련 부처들이 북한군 포로 취재와 관련해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는 인상을 받아서다. “우리 정부가 연관되어 봤자 이 취재는 물론 정부에도 민폐가 된다”는 판단이 취재팀 내부에서 나왔다.
하나둘 실마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우크라이나 키이우로 향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네 번째 키이우 방문이었다. 밤낮 수차례 반복되는 공습경보를 피해가며 10여 일간 북한군 포로 문제에 가까운 우크라이나 정부 인사들을 만났다. 2023년 5월 젤렌스키 대통령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많은 우크라이나 내 친한(親韓) 인사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우크라이나의 한 지한파 유명 언론인은 “젤렌스키 대통령실의 아무개가 ‘키’를 쥐고 있다고 한다”며 “북한군 포로를 만나려 전 세계 여러 유명 매체들이 집요하게 그를 접촉 중인데, 꿈쩍도 안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줬다. 이런 조언과 도움 하나하나가 발판, 그리고 사다리가 됐다.
어렵사리 마련된 우크라이나군 고위 인사와의 만남에서 기회가 열렸다. 대화 과정에서 “북한군 파병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들도 있다”고 하니 그는 “여기 우리가 생포한 포로도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곁의 부관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직접 포로를 만나 보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오늘 중엔 힘들 것 같고…. 연락을 줄 테니 좀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렇게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두 북한군 청년을 만나러 가는 길에 프랑스 파리에서 공수한 김치 컵라면과 초코파이를 가져갔다. 포로수용소 문 앞에 가 보니 국제 적십자사 사람들이 러시아군 포로들을 만나러 와 있었다. 그들의 손에 온갖 먹을거리와 함께 ‘러키 스트라이크’ 담배 수십 보루가 들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기다려 겨우 만난 북한군 청년 두 사람의 침대 머리맡엔 하얀 종이컵으로 만든 담배 재떨이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 지난 한 달 새 꽤 많은 담배를 피운 흔적이 역력했다. 엄습하는 부상의 통증, 곁에서 죽어 간 동료의 기억, 잡히면 자폭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공황, 자식을 사지에 보내고 소식조차 모를 부모에 대한 그리움…. 깊은 밤, 이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떠돌 때 담배 한 모금이 얼마나 절실했을까.
라면과 과자가 든 가방은 간수에게 맡겨야 했다. 담배도 좀 더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일절 말고 일단은 건강 회복에만 집중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 또 올 수 있냐. 바깥 소식을 알려달라”고 했다.
한국에선 흔해 빠진 담배와 라면, 초코파이 몇 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7000㎞ 떨어진 유럽의 전장에서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 두 청년에겐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전해 줄 작은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끈질기게 살아야 할 희망을, 또 더 많은 북녘 젊은이들에게 죽음이 아닌 생명을 전할 기회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포로수용소의 두 청년을 만나야 할 이유로는 충분했을 것이다.
※러시아에 파병됐다 지난달 포로로 잡힌 두 북한군 청년과의 단독 인터뷰는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 “北에서 포로는 변절, 한국 가고 싶다” 전장서 붙잡힌 북한군 인터뷰
☞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5/02/19/2BJNO4FH2RGNDHZZDGW2NSGUC4/
2. “내가 전쟁터 있는지도 모르는 홀어머니, 모시러 돌아가고 싶지만…”
☞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025/02/20/BC25XW5IDFGIRKLNPNLE6TTIF4/
※편집자주 본지는 이번 러시아 파병 북한군 포로 인터뷰 보도 과정에서 포로의 실명을 밝히지 않고,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일부 정보 역시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쟁 포로에 관한 국제법 규정 등에 따라 포로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조치입니다. 그러나 사진·동영상은 이미 우크라이나 정부가 두 사람 얼굴을 여러 차례 드러냈고, 한 달 이상 세계적으로 퍼져 모자이크 등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판단해 편집 회의를 거쳐 모자이크 없는 사진과 동영상을 쓰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립니다. 본지가 공개한 포로의 개인 신상 관련 정보 중 우크라이나군이 이미 공개하지 않은 사실은 없습니다. 모든 인터뷰는 한국 기자임을 밝히고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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