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의 차기 정부를 구성할 연방의회 선거가 23일 실시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2기 출범 후 자유 진영 주요 국가에서 치른 첫 선거다.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유럽의 대(對)미국·러시아 관계는 물론 에너지·이민자 정책 등도 중대 변화를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선거 직전까지 여론조사에서는 중도우파 기독교민주당과 자매 정당인 기독교사회당의 연합(기민·기사연합)이 30%의 지지율로 줄곧 1위를 유지해왔다. 최근 급속히 세를 불리고 있는 극우 성향 독일을 위한 대안(AfD·20%)이 그 뒤를 이었으며, 올라프 숄츠 현 총리가 소속돼있는 중도좌파 사회민주당(15%)은 3위로 처졌다. 유럽 최장수 여성 총리 기록을 세웠던 앙겔라 메르켈(2005~2021년 재임) 퇴임과 함께 야당으로 물러났던 기민·기사연합이 3년여 만에 집권당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경우 독일 새 정부는 메르켈 집권기보다 더욱 ‘우클릭’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우선 더욱 강력한 국경 통제와 이민자·난민 억제 정책이 도입될 가능성이 크다. 기민·기사연합은 총선의 핵심 공약으로 ‘초강력 국경 통제’를 내걸었다. 총리 후보로 나선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대표는 “총리가 되면 취임 첫날 독일 전체 국경을 영구 통제하고 예외 없이 모든 불법 입국 시도를 거부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불법 이민자 유입으로 민심이 악화하자 현 올라프 숄츠 총리의 사민당 정부도 지난해 9월부터 1년 기한으로 국경 전면 통제 조치를 취했는데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영구 봉쇄’를 약속한 것이다. 직전 기민·기사연합 정부를 이끌었던 메르켈 전 총리가 재임 기간 10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던 것과 180도 다른 기조다. 메르츠는 지난 19일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16년 동안 집권했던 기민·기사연합에 지금 난민·이민자 문제의 일부 책임이 있다”며 메르켈의 책임까지 거론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탈(脫)원전 정책을 추구했던 에너지 정책도 원전 가동으로 뒤집힐 가능성이 점쳐진다. 독일의 올해 예상 경제성장률은 유럽 최저 수준인 0.3%에 불과할 정도로 침체에 빠져있다. 여기에 각종 생활용품과 에너지 비용이 치솟고 있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이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메르츠는 에너지 비용 급등과 관련해 “처음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원인일 수 있었지만, 지금의 문제는 현 정부의 효과 없는 친환경 녹색 에너지 정책이 초래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내가 총리로 취임하면 아무런 구체적 대안 없이 원자력발전소가 폐쇄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 재임기 전면 탈원전 방침을 발표하고 2023년 4월 마지막 3기의 원전 가동을 영구 중단했는데 이를 뒤집을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기민·기사연합이 집권할 경우 강력한 원전 부활 정책이 실행될 것”으로 전망했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도 최근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 인터뷰에 “독일이 원전 산업에 복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밖에도 기민·기사연합 집권 시 법인세·부가가치세 인하 등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한 시장 친화적 정책이 대거 도입될 전망이다.
2021년 12월 집권한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는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치안 위기와 ‘유럽의 병자’라는 조롱을 들을 정도로 악화된 경기 침체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급기야 지난해 11월 연합 정부(연정)를 구성하던 우파 정당 자유민주당이 이탈하면서 연정이 붕괴된 데 이어 승부수로 던졌던 의회 신임 투표까지 부결되면서 사면초가 상황이 됐다. 사민당은 집권당임에도 불구하고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까지 지지율에서 밀리고 있다.
이에 따라 2013년 창당 뒤 전례 없는 지지율 고공 행진을 벌이고 있는 극우 성향 AfD가 향후 독일 정국의 중대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각에서 ‘나치 추종 세력’이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는 AfD에 대해 독일의 주요 정당들은 이념의 과격성 등을 문제 삼아 AfD를 연정 파트너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최근 뮌헨안보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한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이 AfD를 외면하는 독일 정당들을 비판하고, 이 당의 총리 후보인 여성 공동 대표 알리스 바이델과 만나는 등 공개적인 지지 행보를 벌였다. 일론 머스크 미 정부효율부 수장(테슬라 최고경영자)도 AfD를 지지하는 연설로 힘을 실어줬다. 이처럼 트럼프 2기와의 유대 관계가 잇따라 부각되면서 연정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AfD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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