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걸린 유럽… 젤렌스키와 긴급 대책회의 - 러시아 침공에 항전 중인 우크라이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2일 영국 런던에서 소집된 유럽 및 나토 회원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쥐스탱 트뤼도(오른쪽) 캐나다 총리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등에 손을 얹고 함께 걷고 있다.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과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뒤따르고 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나고 러시아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평가 속에 유럽의 자유 진영 국가들 사이에서 안보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난달 28일 미 백악관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난 가운데 유럽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정상 15명이 2일 영국 런던에 집결해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 자유 진영을 이끌어왔던 미국의 대통령이 권위주의 국가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방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무례하다”고 몰아세우고 백악관에서 내보내자 러시아의 위협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된 유럽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CNN은 “젤렌스키와 트럼프의 설전은 트럼프가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실)과 긴밀하게 밀착하면서 러시아로 피벗(pivot·중심축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급격한 변화 속에 유럽이 고립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번지는 중”이라고 전했다.

그래픽=정인성

젤렌스키도 참석한 이날 정상회의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2022년 2월 시작된 전쟁과 관련해 유럽이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지속하고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를 배제하는 평화 협상엔 반대한다고 뜻을 모으면서 영국·프랑스가 주도하는 새로운 우크라이나 안보 계획도 추진키로 했다. 유럽 정상들의 긴박한 행보는 냉전 이후 대립해온 미·러가 적나라하게 가까워지며 2차 대전 이후 80년에 걸쳐 구축된 세계 질서가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일 공개된 러시아 방송 인터뷰에서 “미국의 새 행정부가 외교 정책을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우리의 비전과 일치한다”며 미국의 ‘러시아 피벗’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지도자’ 격이었던 미국과 권위주의 독재국가 러시아의 밀착은 한국의 안보에 큰 영향을 끼칠 변수다. 특히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한 지금의 상황을 감안하면 북핵 등 대북(對北) 협상 과정에 러시아가 끼어들고 한국이 배제될 위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은 “트럼프가 대북 협상을 재개한다면 (1기 때인) 2018~2019년보다 훨씬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라며 “당시엔 미미하던 ‘러시아 변수’가 결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북핵 협상 재개되면, 미북러 3자 정상회의 열릴 수도

유럽 정상회의는 런던 버킹엄궁 근처 랭커스터하우스에서 ‘우리의 미래를 지킨다(Securing Our Future)’란 표어 아래 2일 열렸다. 회의에선 나토로 상징되는 미국과 유럽 간 ‘대서양 자유 동맹’의 분열을 막는 동시에, 유럽의 방위 태세와 안보를 강화할 방안이 논의됐다. 3년 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약 1828억달러, 유럽은 1548억달러를 지원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등을 돌린다면, 지원금이 절반 이하로 줄면서 우크라이나의 전력(戰力)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서로 맞잡은 우크라·영국·프랑스 정상 -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유럽 및 나토 주요 회원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키어 스타머(가운데)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인사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회담을 주최한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는 “(지금의 위기 상황은) 유럽 안보가 한 세대에 한 번 맞닥뜨릴 결정적 순간”이라며 “우크라이나에서 평화가 잘 도출돼야 유럽 대륙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했다. 스타머는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이 참여해 우크라이나 안보를 지키는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을 추진하겠다고도 밝혔다.

유럽 정상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과정에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유럽·미국의 협의 채널을 복원할 방법도 모색했다. 조만간 정상회담을 예고한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밀착하기 전에 미국을 나토의 틀 안으로 다시 끌어들여야 한다는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이 러시아로 다가가는 지금의 변화는 러시아의 바람대로 미군이 동유럽에서 철수하고 유럽이 러시아의 위협에 더 취약해지는 유럽 최악의 악몽을 일깨우고 있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트럼프가 러시아로 기우는 배경에 대해 주요 언론들은 패권 경쟁 중인 중국에 대한 견제, 러시아로부터 얻을 경제적 이익을 노리는 트럼프식 ‘셈법 외교’ 등을 지목한다.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가 만드는 새 시스템엔 새로운 계층 구조가 존재한다”며 “맨 위가 미국, 그다음은 유용한 자원이 있고 지도자의 입지가 확고한 러시아·중국·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다. 미국에 의존하는 약한 동맹국은 맨 아래”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구도를 볼 때 트럼프가 한국 또한 철저한 ‘힘의 논리’로 압박해올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미·북 간 북핵 협상에 러시아가 큰 역할을 하면서 트럼프(미국), 김정은(북한), 푸틴(러시아) 간 3자 정상회의가 연출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신각수 전 외교부 1차관은 “트럼프는 한번 마음먹은 건 잘 바꾸지 않는다”면서 “트럼프가 (지난해 유세 때처럼) 한국을 ‘머니 머신(돈 기계)’ ‘안보 무임승차국’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1기(2017~2021년) 때 그가 한국에 요구했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주한 미군 축소 등의) 사안을 이번에는 더욱 거칠게 협상장에서 관철시키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1기 당시엔 중국이 북한과 가장 가까웠지만, 지금은 북한군 러시아 파병 등으로 북·러가 더 밀착한 상태란 점도 변수다. 윤영관 전 장관은 “김정은은 지금 푸틴을 ‘뒷배’로 여긴다. 푸틴이 미·북 핵 협상에서 북한에 유리한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해 러시아는 북한의 요구를 받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안에 ‘거부권’을 행사해 안보리의 주요 대북 제재 감시 기능을 없애버렸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은 일단 우크라이나 문제를 정리하고 나서 중국 견제에 총력을 기울일 전망”이라며 “그런 점에서 한국은 (중국 견제에) 지정학적 가치를 가진 나라로서 우크라이나보다는 대미 협상에서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가인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 차관이 저서 ‘거부전략(The Strategy of Denial)’에서 대중 견제의 핵심 우호국으로 일본·호주·인도를 꼽고, 한국은 ‘담장 위에 서 있는 존재’라고 쓴 점은 걸린다”고 말했다. 미국에 확실한 전략적 가치를 보여주지 않을 경우 트럼프의 ‘아시아 새판 짜기’에서 한국이 배제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니시노 준야 일본 게이오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은 “트럼프가 북한과 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동결 수준의 (불완전한) 합의를 한다면 일본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한일 양국이 힘을 합쳐 미국과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긴밀한 정책 조율을 하는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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