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워싱턴 DC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쫓겨나다시피 출국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다음 행선지는 대서양 건너 영국이었다. 2일 런던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유럽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주요국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저녁 무렵 헬리콥터를 타고 왕실 별장인 노퍽주(州) 샌드링엄 영지로 향했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 3세는 차와 과자를 내놓고 젤렌스키와 한 시간 남짓 환담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서른 살 아래로 아들뻘인 젤렌스키가 트럼프로부터 박대당하는 과정에서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도닥이고 위로했을 것으로 외신들은 추측했다. 젤렌스키는 회동 뒤 “우크라이나를 도운 국왕께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트럼프에게 호되게 당한 뒤 영국으로 날아온 국가 지도자는 젤렌스키만이 아니다. 이번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찾은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3일 샌드링엄 영지로 와서 찰스 3세와 만났다. 찰스 3세는 영연방인 캐나다의 형식적 국가원수인 만큼 트럼프 미 행정부와의 껄끄러운 관계 등 캐나다가 처한 당면 현안들이 대화 주제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취임 전부터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폄하해 불렀고, 캐나다산 수입품 25%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며 양국 관계가 얼어붙었다. 트뤼도는 찰스 3세를 만나기에 앞서 “국왕을 뵙고 캐나다와 캐나다 국민에게 중요한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가 미국 국익을 앞세운 행보로 동맹국들과 잇따라 갈등하는 가운데 찰스 3세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과 급속하게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뒤숭숭해진 자유 진영 국가들 사이에서 찰스 3세의 존재감이 부쩍 커지는 모습이다. 일각에선 오랫동안 모친이자 선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명성에 가려졌던 그가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찰스 3세가 워싱턴에서 만신창이가 된 젤렌스키를 사적 공간으로 초청해 별도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지지하는 기존 영국 왕실의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됐다. 이 같은 행보는 러시아와의 담판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매듭지으려는 트럼프를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앞서 지난달 27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찰스 3세의 영국 방문 초청 서한을 전달받고 “영국이란 환상적인 나라를 다시 방문하게 돼 영광”이라고 반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영국 왕실에 대한 동경이 찰스 3세의 존재감을 키워준다는 분석도 있다.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출신인 트럼프가 오래전부터 영국 왕실의 오랜 전통과 권위를 흠모해왔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영국 왕실에 대한 트럼프의 존경심이 이들을 강력한 외교적 도구로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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