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영국 런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린 EU정상회의에 모인 유럽지도자들. /EPA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27개 회원국 전체의 빠른 군사력 강화를 돕기 위해 총액 8000억유로(약 1258조원)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을 사실상 확정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커진 유럽의 안보 위기에 대응하고, 냉전 이후 30여 년간의 군축 기조로 취약해진 군사력과 방위 산업을 재건하려는 것이다. EU는 이 중 1500억유로(약 236조원)를 자체 예산으로 마련해 유럽산 무기 구매 대출에 쓴다. 유럽 방위 산업의 부활을 지원하는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악화 일로인 ‘대서양 동맹’의 와해 가능성에 대비해 미국산 무기 의존도도 줄이겠다는 심산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9일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유럽 재무장 계획을 설명했다. 총 8000억유로 중 EU 예산으로 지원되는 1500억유로를 뺀 나머지 6500억유로는 각국이 자체적으로 마련한다. EU는 군사력 강화로 인해 회원국의 재정 적자가 커지더라도 ‘예외적 상황’으로 인정해 눈감아 주기로 했다. EU는 경제·금융 안정을 위해 각국 재정 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규제해 왔지만, 당장은 군비 확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5일 발표된 이 계획은 7일 우크라이나 지원과 유럽 방위력 강화를 위한 EU 특별 정상 회의에서 27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회원국 정상들은 공동성명을 내고 “유럽 안보·방위를 위한 지출을 막대하게 늘려야 한다”며 “전략적 의존성을 줄이고, 유럽 전역의 방위 산업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략적 의존성’은 미국에 대한 무기 의존을 지적한 것이다. 현재 유럽 국가들이 보유한 핵심 무기의 약 55~60%가 미국산으로 추정된다. 그 사후 관리와 운용 정보 역시 미국에 대부분 의존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본격화한 유럽의 재무장 움직임은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후 급격하게 빨라지고 있다. 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보 지원에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유럽이 ‘안보 무임승차’를 하면서 방위비를 아끼는 만큼 미국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인식이다. 그는 첫 임기 때부터 “유럽이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방위비로 쓰지 않으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했고, 지난해 2월엔 “방위비를 제대로 분담하지 않으면 러시아의 침공을 유도하겠다”는 발언까지 내놨다.

2월 28일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당신은 우리에게 더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는 지난 6일에도 “나토 국가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그들을 방어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대부분이 유럽 국가인 나토 회원국들에 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란 요구를 하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직면한 유럽엔 절체절명의 위기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핵무기 보유국이자,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재래식 군사력을 갖고 있다. 미국 없이 맞서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CNN은 “러시아는 북한과 이란이라는 군사 동맹까지 확보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지난달 정상회담 중 “왜 (군사 지원을 해준) 미국에 감사해하지 않느냐”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면박하고 백악관서 쫓아낸 데 이어, 지난 4일 군사 지원을 잠정 중단하자 유럽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한 고위 외교관은 “우크라이나와 똑같이 유럽이 당할 수 있다는 전망, 트럼프의 미국은 동맹이 아닌 리스크(위험)가 됐다는 평가가 확산하고 있다”며 “미국과의 ‘안보 디리스킹’이 언급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은 유럽이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을 줄이는 정책을 설명할 때 써온 표현이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9일 유럽 재무장 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우리가 구매하는 무기의 약 80%가 (미국 등) 비(非)유럽산”이라며 “이는 유럽에 좋지 않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냉전 이후 유럽 각국 군대의 미국 방위 산업 의존도가 높아진 현실을 지적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특히 F-35 등 최신 스텔스 전투기, 핵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미사일 무기의 미국 의존도가 높다. 지난 3년간 유럽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무기도 상당수가 미국산이다. 포탄의 경우 지난 30여 년간 유럽 내 생산량이 크게 줄어 자체 수요도 충족 못 하는 수준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9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연설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EU의 재무장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면 EU 내 23개 나토 회원국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현재 약 2%에서 3.5% 수준으로 오른다. 이에 힘입어 유럽 국가들의 재무장 및 방위 산업 재건은 더 빠른 속도로 이뤄질 전망이다. 독일의 경우 지난달 총선에서 승리한 중도 보수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 후보가 ‘안보 독립’을 선언하면서 최근 4000억유로 규모의 군비 확장 및 방산 투자에 나섰다. 또 14년 만의 징병제 부활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와 인접한 폴란드·핀란드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도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폴란드는 한국산 전투기(FA-50), 탱크(K2 흑표), 자주포(K9 썬더), 지대공미사일(천궁) 등 약 31조원 규모의 무기를 구매했다. 또 2035년까지 국방비를 GDP의 5%까지 확대하고, 현재 15만명 수준인 병력을 50만명으로 증원키로 했다. 2023년 4월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는 F-35 스텔스 전투기 64대를 구매하고 한국산 K9 자주포 96문 도입 계약을 맺었다. 해군 전력 강화를 위한 현대화 프로젝트에도 뛰어들었다.

그래픽=양진경

발트 3국은 방위비를 GDP의 4~6%대로 늘리기로 하고 대규모 무기 도입과 징병제 실시에 나섰다. 덴마크는 총 500억크로네(약 10조원)의 추가 국방비를 편성해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을 내년까지 3%대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 돈은 대부분 최신 무기 구매에 투입된다.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는 지난달 19일 “국방 장관에게 전할 메시지는 단 하나다. 무기를 사고, 사고, 또 사라(buy, buy, buy)”라며 강력한 군사력 확대 의지를 내비쳤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전부터 ‘유럽 합동군’ 창설을 주장하며 자강론에 앞장서 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프랑스의 핵무기로 유럽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발언도 했다. 프랑스는 올해 국방 예산을 지난해보다 7% 많은 505억유로로 늘리고, 매년 30억유로씩 계속 늘리기로 했다. 또 극초음속 미사일과 인공지능(AI) 무기 개발을 위한 예산도 따로 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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