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부 루스벨트 호텔 정문으로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아이들은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온 듯 자연스럽게 떠들었다. 건장한 체격의 경비원 세 명과 아이들의 등하교를 지도하는 인솔자가 인원을 파악했다. 한 경비원에게 “아이들이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곧 호텔 문을 닫게 되는 것은 맞는다”고 했다.
출입구 옆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에콰도르에서 국경을 넘어왔다는 그에게 “호텔을 나가면 어디로 가게 되느냐”고 물으니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랜드센트럴 기차역과 록펠러센터, 고급 쇼핑 거리로 유명한 5번가 등 뉴욕의 명물 사이에 있는 루스벨트 호텔은 난민 위기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뉴욕은 2022년 전후 멕시코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의 최종 정착지로 떠올랐다. 약 20만명의 난민이 몰려들자 뉴욕시는 호텔과 계약을 맺고 이곳을 난민 수용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3년간 방 1000여 개를 빌려 난민에게 제공했다. 2억2000만달러(약 3189억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1924년 문을 연 이 호텔은 맨해튼 출신의 진보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1901~1909년 재임)을 기리는 의미에서 루스벨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과거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로비를 자랑하는 맨해튼의 최고급 호텔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최근 뉴욕은 더 이상 난민을 받지 않고 지금 머무는 사람들도 차례로 내보내 오는 6월까지 호텔을 비우겠다고 선언했다. “난민이 줄고 있다”는 이유다. 코로나 팬데믹 직후 매주 4000명씩 뉴욕에 도착했던 난민은 현재 35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전해졌다. 지금껏 이어 오던 난민 포용 정책을 도널드 트럼프 정부 들어 내동댕이친 ‘진보 도시’ 뉴욕의 변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경 차르(국경 정책 총괄) 톰 호먼은 이날 언론에 “뉴욕시는 불법 이주자에 잘 대처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난민들이 모두 나간 뒤 루스벨트 호텔은 매각되거나 재개발될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호텔 내부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동산 업계에서는 상당히 낡고 망가졌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난민들이 공짜 호텔을 아끼지 않고 마음대로 썼으리라는 것이다. 호텔은 파키스탄 국제항공이 자회사를 통해 소유하고 있다. 뉴욕시는 건물 수리 비용을 일부 부담하기로 계약돼 있다. 뉴욕포스트는 “호텔 가치는 10억달러 정도로 추정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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